학창시절 성적표
지금도 학창시절의 성적표를 가지고 있다. 학창시절의 성적표를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이유는, 추억이라기보다, 놔두면 훗날 도움이 되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나의 ‘학교 성적표’를 보면,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선생님이 특기사항에다 ‘발표력 좋다’, ‘창의적으로 해결한다’는 등의 내용을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 과학점수가 제일 높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사기소리 성당초등학교에서 당진 탑동초등학교로 전학을 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은 학업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군대식으로 괴롭혔다. 원자폭탄, 반듯이 누운 채로 고개를 들고 양팔을 위로 드는 군에서나 볼 수 있는 가혹행위까지 했다. 미국 같으면, 그런 선생님은 완전히 매장되었겠다. 나의 학교성적은 다시 형편없게 되었다. 강압적으로 나오면, 나는 그 공부는 하지 않는다. 나의 공부는 자율성이 주어질 때만 성립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나는 그림 그리기에서 상을 받았다. 열심히 새마을운동을 그렸는데, 선생님은 자연보호로 인정했다. 새마을운동을 그린 게 자연보호로 인정을 받아 상을 받게 되었다. 1981년 10월 13일의 일이었다. 내가 미술가의 길을 택했다면 초현실주의 화가가 되었겠다. 초현실주의 화가가 아니면 초현실주의 조형 예술가가 되었겠다. 3학년은 이렇게 건너간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은 뚱뚱하셨다. 뚱보 선생님은 좋은 분이셨다. 정도영 선생님이 특별활동 시간에 칠판에다 분필로 ‘White’, ‘Black’이란 단어를 적으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퍼플은 보라색이라고 말씀하셨다. 발음은 좀 엉망이었지만, 힘 다해 가르쳐 주셨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였는지, 나의 학교성적은 평균 십 점 이상 올랐다. 그래서, 나는 진보상을 타게 되었다. 1982년 6월 14일의 일이다. 지금(1998년)으로부터 16년 전의 일이다. ‘제 270호. 상장. 4학년 4반. 성명 변성재. 진보상. 위 학생은 교내에서 실시한 2차 학력평가에서 그 성과가 뛰어나게 훌륭하였기로 이 상장을 줌. 1982년 6월 14일 탑동국민학교장 구자록’. 그러다, 나는 동상까지 탔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대전 대흥초등학교로 전학을 하게 된다. 대전 대흥초등학교는 특별활동을 잘해주던 학교였다. 학교성적은 또 다시 올라갔다. 산수성적은 ‘수’였다. 다른 과목들은 두 가지(사회, 음악) 빼고 '우'였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학교 교육은 주입식이었고 강제적이었다. 나의 학교성적은 다시 곤두박질했다. 수학은 ‘양’을 맞았는데, 수업시간에 조금이라도 집중을 하면 확 올라가고, 집중을 전혀 하지 않으면 확 내려가고 했으므로, 결국, 수학 성적은 ‘양’, ‘가’로 남았다. (80점+20점)/2는 ‘양’ 또는 ‘가’였다. 나의 학창시절을 알게 된 어떤 분은 나의 인생이 천재 수학자 갈루아를 닮았다고 해주었다.
어쨌든 나의 학창시절 성적표는 일종의 논문으로 작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성적은 강압보다는 자율성을 보장해 주는 상태에서 더 높게 나올 수 있다는 결과이다.
나의 이런 생각은 몇 년 정도 만에 적중했다. 1997년 10월 22일자인가 10월 23일자인가 중앙일보에, ‘‘자율성을 주니, 점수가 더 좋게 나오는 것 같더라(?)’라는 결과가 있었다’는 식으로 나와 있었다. 통제하는 공산주의보다 자율성을 보장해 주는 자본주의가 훨씬 발전했다는 사실은, 자율성을 보장해 주는 상태가 발전에 있어서 훨씬 효과적이라는 불변을 뒷받침해 준다. 성적표를 버리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하긴 반에서 꼴지 3등인가 한 성적표는 부모 몰래 연탄난로 속에 집어넣었다. 나의 기억으로, 고등학교 2학년 때의 기말고사 성적표였다. 55명 중에 53등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정도니 난로 속에 들어갔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