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재문학관/시

획일교육의 파멸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 수 있을까

아전가드 2015. 6. 30. 17:46

획일교육의 파멸을 위해 파우스트가 될 수 있는가! 답은 ‘NO’였다. ()으로 악()을 이길 수는 없는 일이다. 선근마(善根魔)는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나는 목적보다 과정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나의 인생 중,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는 아니지만, 저주받은 시인을 꿈꾸었기 때문일까. 내가 랭보 같은 악마적 천재를 꿈꾸었기 때문일까. 남고자 했다면 획일교육을 향한 분노, 미래에 대한 불안, 꿈을 짓밟힌 상태와 학교폭력의 후유증으로 인한 괴로움, 한국의 기성세대를 향한 저주, 자폭적인 삶에 대한 동경,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자의 정신적 괴로움, 가톨릭과 점성학 사이에서의 엄청난 갈등, 하느님께 대한 반역,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초조함, 나를 바보천치로 모는 아버지를 향한 엄청난 증오, 그리고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까지, 이 밖의 등등의 저주받은 시인이 될 수도 있었다. 한국의 교육 현실이 엄청나게 싫었던 나는, 현실에서 도피하기까지 했다.

 

내가 악마적 천재를 꿈꾼 때는 보들레르를 알게 된 1996년이었다. 랭보 같은 악마적 천재를 꿈꾼 때는 김현 교수가 번역한 지옥에서 보낸 한철’, 이준오 교수가 아르튀르 랭보 100주기 기념으로 출판한 랭보시선을 산 후로 랭보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후였다. 나는 랭보가 마음에 들어, 태학당에서 나온 시집인 그 누가 커다란 사랑에 관하여 말하리(태학당, 김학준 옮김)’까지 문경서적에서 샀다. “랭보여, 내가 커다란 사랑에 관해서 말하리라라고 다짐했다.

그렇지만, 나는 랭보를 알게 된 지 1년 반 정도 만에 악마적 천재가 되는 것을 포기했으며, 이미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했는데. 다시는 악마적 천재를 꿈꾸지 않겠다고 다짐했거늘, 하느님은 양이 안차시나 보다. 어쩌면, 죄와 벌은 항상 따라다녔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곧 괴로움일는지 모른다.

어차피,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완전히 꼬이던 인생, 앞으로 더 꼬인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겠다. 찍히거나 태어날 때부터 저주받았던 사람의 최후는 불행했다 -지난날의 회고.

 

나에게 세 가지 실수가 있다면 첫 번째는 한국의 중학교고등학교를 다녔다는 것이요, 두 번째는 장영주, 장한나처럼 미국으로 가지 못했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지난날, 과학동아를 많이 읽지 못했다. 과학동아를 매달 열심히 읽었더라도 다 빈치, 에디슨이 안 부러웠을 텐데, 후회가 막심하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에디슨이었고 나의 중등학교 시절은 갈르와였고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빛과 어둠 중의 택일에 놓였다. 지난날, 나는 인물 패러디를 한 적이 없다. 훗날 누가 얘기하길 나는 물이었고 어둠에 영향을 받았다. 나는 극단적인 양극을 추구하는 전갈이었다.

류시화는 자신이 어둠의 지배를 받는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는데, 나의 판단으로, 자연처럼 신비스러우라고, 삶을 사랑하라고.

그러나 애당초, 토성과 화성은 같지 않았다. 류시화는 토성이었고 나는 빌 게이츠, 조지 갤럽, 테드 터너의 경우처럼 화성이며 명왕성이었다. 물병궁 시대에 흙과 물이 할 일은 무엇일까.

전문대학 시절은 랭보였다. 나는 랭보를 알지 못했다. 이후로는 괴테와 다 빈치의 길을 걸어갔다. 내가 원해서가 아니었다. 저주받거나 찍힌 사람의 길은 늘 그렇다. 나는 반항적인 랭보의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

과거에는, 가톨릭 성직자를 꿈꾸었으나 훗날, 학문과 예술을 주관하는 신(대천사=천신)을 꿈꾸는 바람에 하느님을 꿈꾸던 루시펠처럼 추락하였다. 파우스트를 꿈꾼 상태는 아니다.

오만과 광기, 그리고 분노와 증오는 고등학교 때부터 나의 원초적 힘, 검붉은 격정이 나를 다른 길로 가게 했다. 하수구를 벗어나기를 바라고 또 바란 과거가 다시 보인다.

쇼생크 탈출에서 의미심장한 말이 나온다. 한국의 현실로 받아들여, 냄새나는 하수구(=한국의 중학교, 한국의 고등학교)를 통과해 희망을 찾아 나선다. 날고 싶은 새(=어린이, 청소년)의 희망(=)을 빼앗는 것은 틀림없는 죄악이다. 획일교육에 굴복은 하느님이 루시펠을 용납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이제 나는 늙었어라. 27세의 나이, 서양 나이로는 25. 나의 시절은 다 끝났다는 생각이 나를 힘없게 하네. 새싹들에게 눈을 돌려야 할 때가 되었으리라! 참으로 긴 세월이었다.

 

친구여, 네가 나에게 말했던 내용의 상태가 67년 뒤, 미국의 심리학자에 의해 비슷하게나마 증명이 되었다. 동아일보에도 실렸다. 2면이었다.

친구여, 너는 나에게 잠자고 일어나면 잃어 버렸던 단어가 기억나지 않느냐?”고 물었지.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너는 내가 그렇다고 하자, 의아해하며 의문시 했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제도는 이끌어 줄 그릇이 되지 못했다. 오로지 서울대 타령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선수를 쳤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세계적 학술지에 실릴 수 있었을까. 그래도 짓밟혔을 것이다.

칵테일로 15억 원을 벌은 이상협 사장도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었다. 지금도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해 방황하는, 좌절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들 공부할 때, 너는 뭐 했냐고 묻고 싶은 사람도 있겠다. 누구들이 칠판을 열심히 쳐다볼 때, 나는 우주의 원리를 간파하려고 했다.

교육이 제대로였다면, IMF한파 정도야 우스울 민족이 지금도 겔겔 거리고 있다.

하이텔 플라자에 오세원님이 있는데 한국의 어린이들은, 한국의 청소년들은 그처럼 우수했다. 고등학교 때의 친구나 오세원님이나. 어린 시절의 백과사전 얘기라, 아주 흥미로운 얘기다(1998.04.01.20:26:50).

 

이제는 선생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렴. 정직한 너희들의 맑은 마음이 속이는 게 뭐가 있으리.

선생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렴. 그깟 학교성적이 나쁘다고 기죽을 필요는 더 이상 없으리니(1998.04.08.19:03:24).

 

나는 자신의 길을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과, 자신이 선택한 학과가 자신과 맞지 않거나 유망한 학과가 아니라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봤다. 가슴이 아팠다.

어떤 사람은 연극영화과(서울예술대학, 중앙대 등)를 가면 좋은데, 여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재수를 하며 젊음을 낭비하고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프로듀서(PD)를 하면 좋은데 졸업을 앞둔 학년이 될 것을 생각하며 취직(앞날)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은 연예인 매니저를 해도 손색이 없으며 DJ를 해도 손색이 없는 사람인데 자신의 길이 뭔지를 잘 모르고 있었다.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재능과 좋은 앞날을 찾아주고 싶다. 앞으로, 나는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방향을 제시해 주겠다(1999.03.02.12:54:58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