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교육부총리 봐라(아이큐 두 자리의 학창시절)
어머니는 뜨개질을 하시며 나에게 이사악에 관한 얘기, 요셉에 관한 얘기, 모세에 관한 얘기 등을 들려 주셨다. 초등학교 3~4학년 때로 생각된다.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간 얘기를 들으며 요셉에 관한 상상까지 했다. 요셉은 꿈 해몽을 잘 했음을 어머니께서 들려 주셨다. 나는 어머니께서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재미있어 했다.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이야기는 나의 EQ에 영향을 주었을지 모른다. 유태인의 ‘베드 사이드 스토리’ 비슷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베드 사이드 스토리란,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자녀가 잠이 들기 5분 전에 자녀 곁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태를 가리킨다. 나의 어머니는 ‘자녀 곁 스토리’를 행하신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어머니는 나를 태권도학원, 주산학원에 보내 주셨고, 대흥초등학교로 전학(1983년)한 후로는 대전 경암빌딩 부근의 건물에 있던 서예학원에 보내 주셨다.
나는 서예학원을 다닐 때, 천자문을 공부했다. “하늘천따지(땅지)검을현누를황, 집우집주넓을홍거칠황….” 천자문(千字文)의 한자를 신문지에다 붓으로 썼다. 내가 서예학원을 다니게 된 이유는, 내가 글씨를 워낙 못썼기 때문이다. 펜글씨 학원에도 다닐 번했다. 훗날 내가 워드를 배운 이유 중에, 내가 글씨를 못 쓴 점도 들어간다. 여기에서 ‘글씨를 워낙 못썼기 때문이다’는 글씨체가 고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나는 주산학원을 다닐 때, 소년한국일보에서 주관하는 주산시험 7급 부문에서 금상을 타기도 했다. 태권도는 5급까지 배웠다. 내가 태권도를 5급까지 배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리하게 운동을 하면 키가 안 큰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그만 다니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태권도 학원을 다닐 수 없게 된 것이다.
서예학원을 다닐 때, 서예학원을 잘 가다, 어느 날부터 나는 서예학원을 가지 않고 오락실로 직행했다. 그 후, 나는 서예학원을 아예 가지 않았다. 돈 낭비가 되었다.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이 사실을 모르고 계신다.
나는 오락실에 거의 매일 갔기 때문에 어머니께 많이 맞았다. 대전으로 이사한 후의 일이다. 옆집에서, 나 때문에 자기 자녀가 악영향을 받는다고 나의 어머니께 뭐라고 했다. 그래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옆집에 살던 사람의 자녀보다 이창호가 크게 되었다.
시골에서 살았을 때는 썰매타기를 즐겼다. 눈이 쌓인 날이면 친구들과 비료포대를 가지고 놀았다. 눈썰매에 뒤지지 않았다. 불 깡통도 돌려봤다. 연을 만들어 날리기도 했다. 활을 만들어 쏴보기도 했다. 나는 활쏘기도 뒤지지 않았다. 나는 볼록렌즈로 검은 종이를 태우기도 했다. 트리오와 대롱으로 비누 풍선을 만들기도 했다. 지렁이를 잡아 낚시도 즐겼다. 눈싸움도 눈사람 만들기도 즐겼다. 나는 친구와 어디로 갈 때, 친구가 하는 방법대로 보릿대를 꺾어 보리피리를 분 적이 있다. 한하운 시인의 시(詩) 중에 ‘보리피리’가 있는데, 첫 부분은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또한, 나는 상당히 부지런했다. 냉이를 캐러 다닌 적도 있다. 친구들이 토끼를 잡으러 가자고 해서, 어머니께 “산으로 토끼를 잡으러 가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린 적도 있다. 어머니는 길을 잃을 수 있다며 완강히 만류하셨다. 그래서, 나는 토끼를 잡으러 가지 않았다. 내가 만든 창까지 준비했었는데. 토끼를 잡으러 갔다면, 집으로 돌아오기가 힘들었겠다.
냇가로 물고기를 잡으러 간 적도 있다. 나는 붕어, 미꾸라지를 주로 잡았다. 나는 잠자리도 잘 잡았다. 잠자리채도 만들었다. 씨름장에서는 모래를 파거나 하며 논 적이 있다. 나는 수영도 좋아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기마전을 하다 다친 적도 있다.
아버지를 따라 논에 가서 벼를 심기도 했다. 그 당시는 기계화가 된 곳이 거의 없었다. 손으로 일일이 벼를 심어야 했다. 줄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연결하고, 여러 명의 사람들이 일렬횡대로 선 후로 벼를 심었다. 벼를 서너 포기 손에 잡은 후, 직접 손으로 심어야 했다.
나는 여행도 좋아했다. 여행이라기보다 놀러 다녔던 것이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 소풍도, 훗날에는 성당에서 하는 수련회도 결코 빠지지 않았다. 성당에서 하는 다른 행사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당진 성당 주일학교 선생님을 따라 서산 마애삼존불에 갔던 게 기억이 난다. 불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주일학교 여자 선생님이셨다. 마애삼존불 앞에서의 주일학교 선생님의 분향 후로, 같이 갔던 2학년 몇 명과 함께 마애삼존불에 인사를 드린 게 생각난다. 그 당시는 첫 번째 계명(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때문에 걱정이 되었지만, 지금은 상관없다는 생각이다. 경배가 아니라, 위대한 삶을 사신 분에 대한 존경이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남자 스님이 한 분 계셨는데, 아주 친절하게 마애삼존불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다. 백제의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불교(佛敎)를 굉장히 좋게 평가한다. 이상하게도 불교에는 전혀 거부감이 생기지 않는다. 불교가 사색(思索)적이기 때문일까.
나는 카드놀이도 좋아했다. 또한, 부루마블도 좋아했다. 종이를 이용해 개구리, 공, 독수리 오형제의 비행기, 동서남북, 비행기, 회전 미사일 등을 접기도 했다. 고드름 가지고 놀기, 공기놀이, 그림 조각 맞추기, 딱지치기,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상대 글러브로 야구공 던지기, 요요, 윷놀이, 팽이 돌리기, 퍼즐, ‘내가 만든 창’ 던지기, 쥐불놀이 등 여러 다른 놀이도 했다. 만원경으로 주위를 살펴보기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자발적으로 신문 배달을 몇 주 정도 해봤다. 신문 배부처의 횡포는 심했다. 초등학생들이라, 지국은 1만2천 원을 주기 싫어서 뗘먹기도 하고 몇 달을 미루기도 했다.
어쨌든, 내가 신문 배달을 그만둔 이유는, 일을 그만두고 싶어서 그만둔 게 아니라, 내가 신문을 넣던 곳에 전부터 아는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아주머니가 나를 보신 후로 나의 어머니께 “전보다 어렵지 않은데, 성재를 신문 배달시켜서야 되나요?”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어머니의 강요로 신문 배달을 그만두게 되었다.
위의 대부분 경우처럼, 나는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생활통지표의 ‘가정에서란’에다가 ‘정신이 산만하고 노는 데만 힘씀 정서가 형편상 부족하니 따끔한 주의를 주시기 바람.’이라고 남겼겠다. 정작, 정서가 형편없이 부족한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자기의 대들보는 보지 못했다.
나는 탐구심이 강했던 사람이다. 예를 든다면, 당진 탑동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완구용 모터가 110V에서도 돌아가는지를 실험하다 펑!~. 이후로, 다시는 완구용 모터에 전선을 연결하고 플러그 식으로 콘센트에 꼽지 않았다. ‘펑!’하면서 연기가 나더라는 연구결과(?)가 나왔으니 된 것이다.
또 한 번은 간첩을 잡는답시고 구리선에 트랜스를 연결하고 150V까지 전압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합선이 되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다. 내가 설치한 구리선 때문에 주인집 아저씨가 뭐라고 했다.
언젠가, 단발 축포에 불을 붙인 후, 쇠대롱에 넣고 앞에 종이를 대자 ‘펑!’한 후로 종이에 구멍이 생겼다. 화승총을 발명했다고 좋아했는데, 발명은 무슨 발명.
화석을 만든다며 땅을 파고 나뭇잎을 묻어 놓은 적이 있었는데, 지금쯤이면 화석이 되어있을지 모른다. 나뭇잎을 땅에 묻은 지 올해(1998년)로 15년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인가 일어났던 일이 생각나는데 내가 만든 것을 보여 준다며 플러그를 꼽자, 정전인지 방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형광등이 맛이 갔는데, 알고 보니 퓨즈가 끊어져 있었다. 나는 사촌(서리), 동생, 어머니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 퓨즈가 끊어지는 일도 있구나!
훗날(전문대 1년), 라이터가 바지 주머니 속에서 켜질까 하다 라이터를 켰는데, 우아~, 불이 붙었다. 바지 주머니에 구멍이 생겼다. 화상을 입을 번 했다. 화상을 입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에게 있어, 남이 보기에 위험한 행위 역시 재미있는 놀이에 불과했다.
나는 자석을 가지고도 놀았다. 책받침 위에 쇳가루를 뿌리고 책받침 밑에 자석을 대서 움직이며 쇳가루가 보이는 형태를 보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또한, 동그란 자석을 붙이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했다. 이는 이 정도로 끝냅니다.
초등학교 때나 중학교 때나 나는 장난꾸러기였다. 여자 주위로 콩알탄을 집어던진 후, 여자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했다. 여자는 화약총 소리에도 약한 수준을 보였다.
나는 과학 시간이 제일 좋았다. 과학 시간이 제일 좋았던 이유는, 선생님이 과학 시간에는 이론만이 아니라 직접 실험까지 하는 것이다. 막대자석 두 개로 밀고 당기는 실험도 화산 실험도 보여 주셨다. 내가 과학에 관심을 보였던 이유는 초등학교 때 선생님의 그런 교육 스타일에 원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어깨동무’란 어린이잡지를 사 주셨다. 미로를 따라 목적지를 찾아가는 게임도 있었다. 탐정에 대해서도 나와 있었다. 나는 재미있어서 어깨동무란 어린이 잡지를 계속 봤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6’ 내용의 만화도 있었다.
어머니는 해양과학책을 두세 권 사주셨다. 거미줄에 걸려도 거미를 잡아먹을 수 있는 ‘대모자루맵시벌’에 대해서는 어머니께서 사주신 책으로부터 알게 되었다.
탐구심이 강했던 나는, 직접 병아리를 키워보기도 했다. 나의 창조력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초등학교 6학년 때 확실히 길러진 상태라고 생각한다.
탑동초등학교 5학년 때, 대전 대흥초등학교로 전학을 하게 된 나는 영어부에 들어갔다. 어쩌면, 탑동초등학교 4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대흥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께 내가 썼던 일기가 뽑혀, 다른 두 명의 학생들과 함께 반 학생들 앞에서 일기를 읽었다. 나는 일기를 잘 쓴 사람 3명에 속했다. 대흥초등학교 5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은 나의 글 재능을 최초로 인정해 주신 분이다. 대흥초등학교 5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의 성함은 이상기 선생님이다. 이상기 선생님이 계실 때, 반 학생들 앞에 나가서 나의 꿈은 과학자라고 주장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나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이상기 선생님. 자신의 꿈을 발표하는 시간, 반 학생들 앞에서 과학자가 되겠다고 했건만, 처량하게도 과학자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아인슈타인, 에디슨을 뛰어넘는 훌륭한 과학자가 되겠다고 다짐했건만, 한국의 중학교부터는 제가 원하던 곳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저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의 재능을 가장 잘 찾아주는 사람이 될 겁니다. 훌륭한 과학자가 되는 것도 좋겠지만, 훌륭한 과학자가 될 정도의 사람들을 수없이 찾아내 도움을 주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백락상마, 성재상인).” -
대흥초등학교 5학년 때, 나는 어머니께 실험 기기를 사달라고 졸라 기어이 알코올램프, 시험관 등을 사주시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현미경만은 돈이 없다며 사주시지 않으셨다. 몇 십 만 원 했다. 나는 값싼 현미경이 있는지 몰랐다. 그래서, 훗날, 값싼 현미경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값싼 현미경을 내가 직접 사서 식물의 부분이든 뭐든 들여다보곤 했다. 지금도 나의 책장 위에는 그 당시에 사용하던 현미경과 거의 비슷한 현미경이 있다. 2만 원인가 주고 샀다. 어머니는 돈 낭비한다며 뭐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알코올램프, 시험관마저 사주시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변(卞)씨 고집이 어디 가랴. 변씨 고집은 태종의 아들인 양녕대군도 인정했던 고집이었다. 변계량의 고집을 알았기 때문에, 양녕대군은 변계량에게 세자의 직분을 다하겠다는 허위 약속을 했다. 거짓 약속을 해서라도 고집불통인 변계량을 돌려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변계량은 밀양변씨(密陽卞氏)지만 우리 초계변씨(草溪卞氏)와 조상이 같다.
알코올램프, 플라스크, 시험관 등을 가지게 된 후, 아무거나 넣고 끓이는 상태까지는 좋았는데, 나는 이 때문에 사촌누나를 기겁하게 했다. 나는 엉뚱한 면이 많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운동장에 나가, 침식과 퇴적을 탐구했다. 흙으로 둑을 만든 후 터놓으면서 퇴적작용, 침식작용을 탐구했다. 누가 하라고 해서 한 게 아니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내가 좋으면 그만이었다.
‘탐구 생활’의 천구는 직접 만들어 갔다. 반 친구들은 만들 필요가 없던 것이라고 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나는 조립 상자, 조립식 완구를 사다 조립한 후 가지고 놀았다. 권총도 있었고, 로봇도 있었고, 탱크도 있었다. 보트도, 전함도 있었다.
나는 큰삼촌과 오목을 둬, 내가 이기면 큰삼촌이 주시던 상금으로 조립식 완구를 샀다. 5천 원 정도 주셨는데, 내가 지면 뺨을 맞아야 했다. 반 정도는 내기 오목이었다. 큰삼촌은 가톨릭계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아주는 신부님이었다. 또한, 나에게는 말다 고모도 계셨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대전 학생과학관에 자주 가서 과학 기기와 여러 과학자료로 탐구심을 키웠다. 기억에 남은 것은, 버튼을 누르면 탁구공이 위로 떠올랐다. 밑에서 뭐가 불어 올렸나 보다. 나는 학생과학관에 있는 기계를 보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나는 호기심이 굉장히 강한 상태였다.
나는 라디오, 전자키트를 인두와 납을 사용해서 만들었다. 내가 조립한 라디오는 채널이 두 개 정도 나왔다.
나는 전자회로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시계 역시 잘 분해했다.
대흥초등학교는 학교공부만 강조하지 않았으며, 학생들의 재능을 키워주려고 애쓰는 수준이었다. 그 당시의 대흥초등학교 선생님들께 감사합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컴퓨터를 엄청 가지고 싶어했다. 그 당시는 삼보 트라이젬이 인기가 좋았다. 삼보 트라이젬은 8비트 컴퓨터였다. 대우에서는 아이큐1000을 내놓고 있었다.
한편, 금성은 삼보, 대우에 뒤지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퍼스널 컴퓨터를 출시한 상태였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대흥초등학교는 금성 컴퓨터를 40여대 정도 산 후로 학생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미래의, 정보화 사회에 뒤지지 않을 인재 양성을 원했나 보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은 나의 어머니께 “성재에게 컴퓨터를 가르쳐 주세요. 앞으로는 컴퓨터가 유망할 것입니다”라고 말씀했다. 이후, 나의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컴퓨터학원을 찾아 나섰다. 마침내, 나는 대전 한밭컴퓨터학원에서 삼보 트라이젬이란 기종으로 컴퓨터를 배웠다. 두 달 동안 컴퓨터를 배웠는데, 내가 배운 과목은 도스와 베이직이었다. 내가 컴퓨터를 배운 기간은 1984년 5월 1일~1984년 6월 29일이다. 컴퓨터학원의 여자 선생님이 순서도를 칠판에 그리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네모도 그렸고, 마름모도 그렸다.
나는 대전 홍명상가(현. 홍명백화점)에 있던 컴퓨터학원에서도 한달 정도 컴퓨터를 배웠다. 무료로 배웠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금성 컴퓨터를 샀기 때문에 무료 강의였다.
나와 컴퓨터의 인연은 위와 같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시작됐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있은 지 10년,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의 예견이 맞아떨어지는지 컴퓨터가 전 세계를 빠른 속도로 점령하기 시작했다. 컴퓨터를 모르면 컴맹으로 몰리고 있었다. 빌 게이츠가 완전히 등장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초등학교 6학년 때의 담임선생님들 수준은 유태인의 수준에도 뒤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10년 앞을 내다보고 계셨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담임선생님 성함은 채규광. 40대의 선생님이 그 정도의 대단한 예견을 하셨다. 초등학교 4학년~초등학교 6학년 때의 선생님들은 어디를 보나 최고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고무줄 동력 모형비행기를 만들어 날리곤 했다. 나무, 프로펠러, 고무줄, 본드, 종이 등이 재료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대흥2동에서 살았는데, 학생과학관까지 5~10분 걸렸다. 왔다 갔다 하기 아주 편했다. 이러 했기 때문에 나는 과학에 더욱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은하철도 999’를 보며, 후로는 ‘천년여왕’을 보며 우주로의 꿈을 키웠던 사람 중의 하나다. 우주여행도 꿈꿨다. 초등학교 때는, 초등학교 6학년 때는 과학자로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이 거의 충족이 되었던 셈이다.
도서관이나 학생과학관은 집에서 가까울수록 좋다. 자녀의 좋은 앞날을 위해서라면 대전 한밭도서관과 대전 학생과학관이 있는 대전 문화동으로 이사를 하는 게 좋다. 공기가 좋기 때문에 사색하기도 좋다.
내가 자주 갔던 학생과학관은 현재, 충청남도 교육청의 뒤에 있다. 이사한 상태이다.
당진 탑동초등학교는 교장 선생님을 잘 만나서였는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철봉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철봉상을, 뜀틀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뜀틀상을, 학교성적이 10점 이상 오르면 진보상, 학교성적 우수자에게는 학교성적의 차이에 따라 금상, 은상, 동상, 그림을 잘 그리면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상을 주고, 아주 열심히 학생들의 재능을 키워주려고 노력했다. 나도 철봉상, 뜀틀상을 받았다. 더군다나, 개근상은 1년마다 줬다.
대전 대흥초등학교로 전학한 후로 1년, 당진 탑동초등학교를 다시 찾은 적이 있었는데, 학생들의 탐구심을 키워준다며 초미니 댐까지 건설한 상태였다. 친구인 곽봉호가 알려줬다. 대략 2~3평 규모였다. 이를 알게 된 나는 전학한 것에 언짢아졌다. 나는 탑동초등학교의 교육수준을 높이 평가했다. 교장 선생님의 이름은 구자록 선생님, 교감 선생님의 이름은 인치소 선생님이셨다.
한때, 내가 잘나서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하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발견했다고 교만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얼마가 흘렀을까. 생각해 보니 나에게는 아주 소중했던 분들이 계셨다. 내가 그분들을 떠난 지 15년이나 흘렀기 때문에, 나는 구자록 교장 선생님, 인치소 교감 선생님이 살아 계신지 모른다. 그분들이 살아 계시다면, 한 번만이라도 그 위대한 선생님들을 찾아 뵙고 싶다. 짐승도 은혜를 안다고 한다. 돌아가셨다면 사진만이라도 보고 싶다. 초등학교 때의 위대한 선생님들을 생각하며, 그리움에 눈물이 맺혔을 때가 있었다.
스승이 제자를 제 자녀처럼 사랑하고, 제자가 스승을 생명의 은인처럼 존경하였네. 그분들의 위대한 교육철학도 영원한 생명수!, 후손들에게 물려주리. 구자록 교장 선생님, 인치소 교감 선생님 너무 감사합니다. 그 크신 은혜, 죽은 후로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선생님들의 위대한 가르침을 물려줍니다. 선생님들께 배운 대로 갑니다.
⑩ 초등학교 2학년 때는, 초등학교 3학년 때는 학교성적이 아주 좋지 못했다. 왜냐하면, 초등학교 2학년 때의 담임선생이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군대에서나 볼 수 있는 기압으로 괴롭혔기 때문이다. 나 같은 경우, 강압적으로 나오면 적응을 하지 못한다.
그런 선생 밑에 있었던 나의 학교성적은 곤두박질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자연이 수, 다른 과목은 음악(미)만 빼고 다 우였는데, 초등학교 2학년 때는 거의 다 저조했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된 후로는 학교생활에 다시 적응해 갔다. 왜냐하면,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선생님은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선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삼청교육대의 교관이나 하면 알맞은 사람이 초등학교 2학년의 선생을 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을 벗어난 후, 초등학교 3학년을 거친 후, 나는 교장 선생님의 스타일이 마음에 들어서였는지, 담임선생님의 스타일이 마음에 들어서였는지, 초등학교 4학년 때는 학교성적이 껑충 뛰어올라 진보상을 탔으며 얼마가 지났을까, 마침내는 동상까지 타게 되었다. 또한, 학교성적의 향상은 대흥초등학교로 전학한 후까지 이어졌다. 나는 산수를 가장 잘하게 되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구구단을 잘 외우지 못해서 끝까지 남은 두 사람에 들어갔었다. 그러고도 구구단을 다 외우지 못했다. 낙제시키는 제도가 있었다면 요즘으로 해도 낙제생이었다.
탑동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반 학생들은 다 본 책을 학교로 가지고 와 교실 앞의 책꽂이에다 꽃아 놓고, 아침 자습시간마다 돌려가며 읽었다. 뒤질세라 나도 책을 읽었다. 삼국유사, 반공서적을 읽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반공서적에는 김정일이 자기 동생을 웅덩이로 밀어 죽였다는 내용이 있었다. -가난했지만, 학생들은 도심지의 아이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허생전을 탑동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처음 읽었다. 훗날 알게 되었는데, 허생전은 연암 박지원 선생과 관련이 있었다. 허생전에서도 변(卞)씨는 사람을 잘 파악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실제에서도 변(卞)씨는 화씨지벽(和氏之璧)이란 고사성어(古事成語)를 탄생시켰을 정도로 사물이나 사람을 보는 능력이 좋다.
허생 아내의 스타일은 한국의 아내들 모습으로 자리 잡혀야 한다. 어려움을 당하는 한국의 현실에서 아내의 남편을 향한 좋은 부추김이 아주 절실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길거리에서 어떤 사람이 초등학생들을 모아 놓고 동아출판사에서 출판한 ‘동아햇님문고’를 선전했다. 여러 가지 학용품을 보여주면서 초등학생들에게 동화책을 사라고 권유했다. 나는 동화책보다 동화책을 사면 주는 학용품에 관심이 갔다. 학용품 중에 특히, 자동필통이 있었는데, 자동 필통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신기하네, 옆으로도 나오고. 자동 필통을 보게 된 나는 어머니께 동화책을 사달라고 졸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는 내가 사달라는 것을 안 사주시면 난리가 났다. “동화책을 사주시면 공부를 열심히 할겁니다”라는 식으로 엄포를 놨다. 내 고집이 너무 세서 어머니가 항상 손을 들었다.
나는 돈을 주고 산 동화책(70권 정도)을 읽지 않을 수 없어서 읽고 또 읽었다. 내가 책을 가장 많이 읽은 때는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소공녀, 그리스신화 등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읽었다. 상상력의 향상, EQ가 뭔지를 모른 채, 재미있어서, 책 읽는 게 좋아서 읽었다. 소공녀는 마음을 조리며 읽은 동화다. 나는 안데르센 동화 역시 좋아했다.
그러다, 다른 종류의 책도 읽었다. 복어는 알과 껍질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이 들어있다는 사실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알았다.
나의 꿈은 신부 겸 과학자였다. 요즘으로 하면 멘델이었다.
과학을 매우 좋아했던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과학부에 들어가 과학부 친구들과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직접 실험하는 게 즐거웠다.
신부도 꿈꾸던 나는, 큰삼촌이 계시던 대사동 성당에 자주 갔다. 신부님이 미사를 집전하는 장소를 보며, “저 자리는 앞으로 내 것이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고등학교 3학년 때, 곰곰히 생각해 보니, 신부가 되면 결혼을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신부가 되면 획일교육을 향한 무차별 공격이 제약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가톨릭대학은 한국의 입시제도를 따랐다. 나는 가톨릭대학을 들어갈 실력이 되지 못했다. 고등학교 2학년~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나는 가톨릭대학의 입학제도에 엄청나게 반발했다. “구라파는 입시성적을 따지지 않는데 어찌하여 한국의 가톨릭대학은 그렇게 하는 것인가!”였다.
전문대학 때, 신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다시 생겼지만, 신부가 되는 것을 포기한 이유 중 하나는, 아버지가 나에게 신부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내가 여자를 좀 밝혔다는 점도 있지만, 나의 아버지 같은 사람에게서는 사제가 탄생할 수 없었다. 자식에게 신부가 되는 것을 원했다면 마땅한 가르침이 있어야 했다.
나는 반항했다. 자식을 바보천치로 아는 부모보다 멍청한 부모가 없고, 아내를 바보천치로 아는 남편보다 멍청한 남편은 없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한다.
내가 입학한 초등학교는 서울에 있는 고척초등학교였다. 입학한 후로 얼마 되었을 때, 그림을 그리는 시간에, 내가 어머니의 입을 오리처럼 그린 게 생각난다. 여자 선생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다.
이밖에도 얘기할 게 많지만, 초등학교 시절은 이쯤으로 끝낸다. 랭보처럼 불가사의한 인생을 고수하는 것도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고 생각한다.
IQ 두 자리의 중학교 시절1
과학자로의 꿈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비참하리만큼 짓밟혔다. 중학교는 내가 다닌 초등학교와는 달랐다.
중학교 1학년 때, 나는 과학부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과학부는 과학을 하는 특별활동부가 아니라, 과학고를 원하는 학생들을 위한 보충수업반이었다. 학교는 법망을 피하려고 했는지, 그런 식으로 보충수업을 했다. 하긴 과학 영재를 위해서였다.
훗날, 과학고, 외국어고에 대한 특혜를 폐지하겠다고 한 후, 시간이 좀 흘렀을 때, 한 과학고 학생이 “학교 다닐 맛이 안 난다. 우리의 미래는 누가 보상해 주는가?”라는 식의 글을 하이텔의 플라자에다 남겼던데. 그러면, 획일교육에 짓밟힌 대다수 한국 청소년들의 미래는 누가 보상해 줄까? 가출을 선택하는 청소년들의 미래는 누가 보상하나? 방황하는 이들의 미래는? 서울대를 약간 들어가기 힘들다고 “우리의 미래는 누가 보상해 주는가?”라고 하는데, 서울대는 간판장이의 놀이터에 불과했구나!
하이텔 플라자의 어떤 분의 주장대로, 과학고 학생인 경우에는 대학의 이공계를 들어갈 때 가산점을 주면 되고, 외국어고인 경우에는 대학의 어학분야를 들어갈 때 가산점을 주면 된다. 가산점은 수능점수 10~20점이다. 하긴 간판주의는 일반고도 절대로 뒤지지 않기 때문에 특수목적고만 비판할 수 없는 현실이다. 아무튼 대학은 간판주의자들의 몫이 아니다.
어떤 선생들은 학교성적이 저조한 학생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어떤 선생은 학생을 몽둥이가 부러지게 때렸다고 학생들에게 엄포를 놨다. 또 어떤 선생은 때리는 것까지는 좋은데 뻔뻔스럽게, “한국 사람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라고 나이 어린 학생들 앞에서 말했다. 민족 자존심이 상한 학생도 있었겠다. “한국 사람은 맞아야 말을 듣는다”는 주장은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였다. 또, 언젠가, 어떤 선생은 “한국인은 소와 같아서 코뚜레를 하여 끌고 다녀야 말을 듣는다”고 했다.
한국인은 학대해야 말을 듣기 때문에,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이 학생들에게 군대식으로 가혹행위를 했던 것일까. 나의 친구가 오줌을 싼 사실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1998년으로 하면 18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선생님이 아니라 깡패였다. 깡패에게 가르침을 기대한다는 자체가 무리였다. 그런 수준들에게 배운 존재들이,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과학고를 그만두는 것은 당연하다. 특혜를 받을 때만 좋아라 하는 수준은, 약간의 손해라도 생기면 매일같이 투덜거리기 마련이다. 특수목적고든, 일반고든 사생결단이라도 하듯 서로 다툰다.
무슨 이유 때문에 자녀의 위대한 재능을 죽이면서까지 자녀를 서울대에 보내야 하는가? 학문을 위해서인가? 고시 공부시키시려고. 대학은 학문을 가르치는 장소이며, 동시에 새로운 학문적 업적을 탄생시키는 장소이다. 학문(學文)이 없는 대학은 무덤 속의 시체와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는 어머니도 자기 자식만은 대학에 꼭 들어가야 한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자기 자식만은 꼭 출세해야 하기 때문이다. “1년만 참으면 인생이 핀다.” 고3 수험생들이 자주 듣는 말이라고 한다. 결국은 출세, 출세, 출세, 출세라고 한다. 그렇게 교육시킨 자녀가 부모를 모시기 싫어하고, 자기 탐욕을 위해서는 국민의 혈세(血稅)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대학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일 뿐이다. 자기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선택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대학이어야 한다.
“자식이 서울대를 들어가 판검사, 의사가 되면 열쇠가
여러 개 생기므로 저의 자식만은 서울대를 들어가야 합니다.”
나는 수능시험 만점보다 괴테, 다 빈치, 에디슨, 폰 노이만 등이 대단하게 보인다.
서울대에 합격한 아들에게 해외여행으로 과잉 보상을 해주려는 어머니가 있었다. 이에 친지들이 뭐라고 하자, 그 어머니가 버럭 화를 내면서 “그게 무슨 소리야! 일류 대학 합격한 우리 아들 태운 비행기가 영광이지”라고 했다던데, 중증도 대단한 중증이다. 역시나 한국의 간판 지상주의는 독성이 강하다.
자기 자녀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남의 자녀가 어떻게 되든 말든 전혀 관심이 없다. 인신매매를 당하든, 학교폭력에 완전히 희생되든, 자기 자녀가 버릇이 없든, 장애인을 병신으로 취급하든, 남이 죽든 말든 간판대에 합격하면 소위 강력한 면죄부를 받는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서울대를 질투하고 있다고 하던데, 누구들이 보기에 질투겠다. 서울대를 비판하기만 하면 콤플렉스 취급받는다는 얘기가 있다.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다. 강도들이 큰소리친다. 서울대 인간들의 영광은, 수많은 어린이들과 수많은 청소년들의 꿈이 강탈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한 대신이었다. 수많은 청소년들의 절망과 피가 울고 있다.
나는 서울대 추종자들이 콤플렉스라고 하도 하기에 프로이트의 주장을 엎어버리려고 했다. 프로이트에게는 ‘콤플렉스(억압된 의식 아래 잠재해 있는 관념)’가 있지만, 나에게는 ‘에스트리아(창조주가 부여한 천성에 의한 현세의 모든 상태)’가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서울대를 욕하려거든 서울대를 들어간 후 서울대를 욕하라. 노력해서 서울대 가면 될 게 아니냐”라고 하던데. 한국은 서울대가 장악하고 있다고도 엄포를 놓던데. 그런 식으로 나오면 매장을 당한다고 하며. 고작 매장이라. 내가 그 정도로 만만한 상대였을까.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 당할 사람으로 보일까. “매장시키려면 매장시켜라!”라고 하고 싶다. 고작 매장 정도로 나를 위협하다니. -“참새(서울대가 아닌 사람)가 어찌 봉황(서울대)의 뜻을 알리요”식으로도 나오던데, 하긴, 봉황이 어찌 주작의 뜻을 알리요. 청소년들 그만 좀 죽여~!×∞!
서울대가 한국을 장악하고 있어서 어려움은 영광이겠다. 입시공부를 할 시간에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몇십~몇백 이상 이룩하는 게 좋겠다. “몇백 가지 이상의 독창적 아이디어를 내놓고 서울대를 욕하라”고 하지 않은 게 다행이겠다. 획일교육을 멸망시킬 수만 있다면 몇천 가지, 몇만 가지 이상의 독창적 아이디어라도 내놓으려고 하겠다. 다 빈치, 괴테가 죽은 나이까지 산다면 못할 것도 없다. 완벽하다, 노력은 죽는 날까지 계속 된다. 1998년으로 ‘만 25~26세’이다.
프로이트가 별건가? 그런 수준이 진짜 콤플렉스다. 서울대․획일교육 지상주의가 청소년들의 재능을 짓밟지 않았다면 나서지 않았겠다. 싸움은 서울대 지상주의자들이 먼저 걸어왔다. 나는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공격해 오면 엄청난 대가를 지불시킨다. 칭기즈칸 버전이다. 서울대 인간들의 쾌감을 위해 너무도 많은 청소년들이 죽었다. 체력장 사건도 있었다. 나야 태어날 때부터 찍혔으니 인생이 아주 더럽게 뒤틀렸겠지만, 다른 청소년들이야 무슨 죄가 있을까. 굳이, 죄라면 획일교육이란 미친개에게 물린 죄밖에 없겠다.
학교성적 지상주의자들이 꿈 많던 청소년들과 이미 꿈을 무참히 짓밟힌 사람들을 질투나 콤플렉스로 몰 수준이나 되는지. 학교성적이 좋지 못하단 이유만으로 문제아, 병신 취급하며, 어떤 사람은 자살하게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괴로움과 열불 난 상태에 있게 하고, 또 더러는 가출하게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깡패가 되게 하고, 그 잘난 실력에 IMF한파를 맞았었겠다.
학교성적 1~2위들 다 어디로 갔을까. 학교성적이 저조했던 사람들을 깔아뭉갰던 실력은 어디로 갔나 보다. 오히려, 학벌들에게 멸시를 받던 상업고등학교 출신인 김대중 대통령이 IMF한파에 칼을 빼든 상태였다. IMF한파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학교성적만 우수했던 사람이지, 창의성의 존재가 아니다. 이상협 사장은 여전히 걱정 없다.
나는 서울대를 질투한다기보다 진정한 교육 개혁을 가로막는 서울대에 분노하고 있을 뿐이다(어쩌면, 10년이 넘는 세월에도 변함없이 골속까지 존재하는 가공할 만한 적개심!). 다 빈치, 바흐, 에디슨 정도면 또 모른다. 나는 서울대를 경쟁상대로 한 적이 없다. 수준이 맞아야 논다. 획일교육에 환장한 사람들에게 무슨 얘기인들 통할 수 있으랴. 그러나, 갈루아, 고흐 정도의 광기를 부리고 싶지는 않다.
수많은 청소년들의 꿈을 짓밟고, 누구 같은 경우, 10년 이상을 후유증에 분노하며 살게 한 자들이 누구인데, 여전히 획일교육을 고수하고 있다. 그런 수준들이 서울대를 엄청 추종하는데, 정작 서울대에 들어가야 했던 사람들은 서울대란 간판에 환장한 사람들이 아니라, 미국의 심리학자가 ‘수면과 기억력의 상관관계’를 증명한 후 발표한 연도를 기준으로 6~7년이나 앞서 나에게 ‘수면이 기억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던 그 친구나 아니면, 카프카에게도 밀리지 않을 정도의 그 충남대 화공과 학생이었다. 서울대가 우수해서가 아니라, 뭐 같은 교육을 침몰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함도 필요하다. 능력이 우선되는 현실로 바뀜으로 국가에도 큰 이득이다. 한국의 교육 현실은 서울대가 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웃기지도 않는 상태다.
대학이 언제까지 간판, 출세를 위한 직업훈련소로만 남아 있어야 하는가? 대학은 간판에 환장한 사람들에게 가서는 절대로 안 된다. 진정 학문에 맞는+학문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야 한다. 그래야만 국가에도 이득이다.
간판에 환장한 사람들은 한 치의 양보도 없다. 그들은 나에게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내가 볼 때는 과학고 학생들, 외국어고 학생들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상당수 획일교육에 환장한 어머니들이 비정상으로 보인다. 그런 환장을 사랑으로 착각하는데, 자식 사랑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라고 착각하는 수준들이 낙태는 엄청 많이 했다. 자식 한둘도 과외를 시키기 힘든데, 자식이 많으면 얼마나 힘들까. 낙태는 개구리 올챙잇적 생각을 하지 못하는 아주 추잡한 살인이다. 낙태를 당한 태아로 생명을 연장시키려는 시도가 있는데 그런 식으로 목숨을 연장할 바에는 죽음을 택하겠다. 살아봐야 얼마나 산다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경험했을 태아를 이용하여 목숨을 연명하겠는가! 죽음에 직면한 태아들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몇십 분의 쾌락을 위해 태아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하지 않는다. 낙태를 할 바에는 성행위를 하지 않으면 된다. 나는 태아들의 위대한 잠재적 재능도 인정한다.
하여간에, “공부해, 공부해, 공부해, 공부해”로 자녀를 돌게 만들려는 수준들, 사랑이란 이유로 죽어간 것은 너무도 많았다. 어린이의 꿈도 청소년의 꿈도 이미 죽임을 당한 태아까지도.
어떤 어머니에게 아들 둘이 있었다. 작은아이는 학교공부를 잘하는데, 큰아이는 학교공부를 잘하지 못하는지, 작은아이만 위해 주고 큰아이는 문제아로 만들고 있었다. 어머니가 동생과 자신을 비교하는 말을 하자, 큰아이는 방밖으로 나갔다. 작은아이도 뛰어난 편이었지만, 큰아이가 세계적인 인물이 될 가능성을 보였다.
자존심이 무참하게 짓밟히는 상태에서 큰아이는 불량배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자존심이 계속 상하다 보면, 인내의 한계로 인해 탈선을 하게 된다. 사람의 인내는 한계가 있다. 울화가 치미는 것을 어찌하지 못해 주위의 약한 친구, 후배들을 무차별 가격할 수도 있다. 일종의 자포자기(自暴自棄) 심정이다.
문제 학생들이 제대로 재능을 인정받는다면 에디슨, 처칠, 피카소가 되겠다. 그들은 내면에 위대한 정렬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위대한 정렬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니, 위대한 정렬이 잘못된 방향으로 표출된다.
한편, 점수가 약한 학생들을 병신 취급했지만, 특수교육이라고 해서 정신박약인 사람들을 교육시킨 일은 아주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이큐가 70이 안 되던 사람들을 모아 놓고서 기능을 가르쳤다. 정신박약이라고 여김을 받던 학생들은 만들기를 잘했다. 그들에게도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정신박약인 사람들을 병신으로 모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떤 재능에 있어서 만은 정신박약인 사람들이 정상적인 아이큐의 사람들을 크게 능가할 수 있다. 그들을 병신 취급할게 아니라, 그들에게도 기회를 줘야 한다.
중학교 3학년 때, 특수반은 우리 반 교실 옆에 있었다. 특수반 선생님은 특수반 학생들을 굉장히 사랑해 주셨다. 나도 그분의 뜻을 받들겠다. 나 역시 배운 대로 행하겠다.
IQ 두 자리의 중학교 시절2
중학교 1학년 때, 어학실을 가려고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간 적이 있다. 수학 선생이 복도에서 몇 명의 학생들에게 가혹할 정도의 기압을 주고 있었다. 몽둥이로 때리기까지 한 듯, 오른 손에는 긴 몽둥이가 쥐어 있었다. 학생들이 고작 선생의 샌드백일까. 그건 체벌이 아니라, 개 패듯이 패는 수준이다.
수학 선생이 나를 보더니, “왜 이리로 올라와 이 새끼야!”라고 고함을 쳤다. 나는 어학실을 빨리 가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간 상태였다. 뭐 같은 경우를 당할지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냥 1층으로 내려왔다. 그런 자를 상대해봐야 나만 손해이기 때문이다. 미친개는 내버려두는 게 최고다. 대들면 난리가 난다. 그 선생은 알루미늄 야구 방망이를 들고 다니던 선생이었다.
맞은 학생들이 커서 깡패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겠다. 때리는 것을 배웠으니 남을 때리게 된다. 심리학에서 사용되는 말로 ‘적과의 동침(적대자와의 동일시)’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더러운 경우를 계속 보게 되자, 나는 학교공부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꺼버렸다. 수업시간에는 연습장에다 낙서나 하면서 “시간이 빨리 갔으면”만 원하고 또 원했다. 만화도 그려봤다. 만화 스토리라면 몰라도, 만화 스케치에는 재능이 없었다. 훗날의 낙서는 섬세하고, 칼날처럼 예리한 편이었다. 훗날에 알게 된 백제의 작품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딴 생각만 했다. 너무 재미없는 수업이었다. 그런 수업은 과학고, 서울대를 들어가려는 사람이나 받으면 된다. 내가 왜 한국의 중학교, 한국의 고등학교를 다녔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장한나, 장영주가 굉장히 부러울 때가 이때다.
수학은 싫지 않았는데, 학교 자체가 싫었던 나는 수학 시간에도 5분 이상을 집중하지 못했다. 수학은 침몰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집중하면 70~80점대로 올라가고, 아예 집중을 하지 않으면 20~30점대로 내려가고, 왔다갔다하다 완전히 곤두박질했다. 80점+20점의 평균은 50점이니, 수학은 가 또는 양일뿐이었다. 학교공부와 담을 쌓은 나의 학교성적은 보나마나였다. 이 때문에, 나는 가정폭력에도 시달렸다.
중학교 때부터 나의 어머니는 유태 어머니에게 밀리지 않는 어머니가 아니었다. 에디슨의 어머니와 나의 어머니의 차이는 중학교 때부터 크게 벌어졌다. 나의 어머니는 학교성적, 학벌이 좋은 사람과 나를 비교하려고 했는데 서울대 출신 다 합쳐서 다 덤벼도 에디슨 하나를 상대하지 못하겠다. 나의 소중했던 ‘과학자, 발명가로의 꿈’을 버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IQ 두 자리의 중학교 시절3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문학에 처음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으로 수필을 쓰게 되었다. 내가 수필을 쓰게 된 동기는, 학교에서 영어공부를 시킨다며 방송시설을 설치했기 때문이다. 각반에 설치된 텔레비전으로 공부를 시켰다. 조회도 TV로 할 때가 많았으며, 상을 탄 작품은 방송시설을 이용하여 텔레비전으로 방송했다. 당선된 작품을 당선된 학생이 읽었다. 이를 본 나는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게 처음으로 수필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 냄새나는 하수구의 갈라진 틈 사이로 들어오는 그 나마의 희망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처음으로 시를 창작했다. ‘시험이 닥쳐오면 매가 생각이 나네. 선생의 성난 얼굴, 부모의 가혹함’식으로 나가는 ‘시험이 닥쳐오면’이란 제목의 시였다. 친구로부터 잘 썼다는 평가를 받았다.
내가 시를 쓰게 된 동기는, 시를 잘 써 상을 탄 사람이 조회 때 앞에 나가 시를 읽었기 때문이다. 또한, 학교지에 시가 실려 있었는데, 여기에 내볼 생각도 작용했다. 물론, 내가 내려고 한 시는 ‘시험이 닥쳐오면’이었다. 잘 썼다고 평가를 받아도, 학교지를 담당하는 선생이 ‘시험이 닥쳐오면’이란 시를 학교지에다 싣지 않았겠다.
중학교 2학년 때 ‘노아의 홍수와 대륙 이동’을 주장했지만, 시간적 차이로 무너졌다. 좋은 가설이라고 생각했는데, 노아의 홍수는 대륙을 이동시킬 만한 증거가 될 수 없었다.
나는 지구과학 선생님이 마음에 들었다. 지구과학 선생님은 직접 뭐든 만들어 오는 것을 숙제로 내주셨는데, 역시나 창의성을 중요시 하셨다. 조립식 완구를 조립해 오는 것보다 창작품에 점수를 더 주셨는데, 지구과학 선생님은 역시 멋있었다. 나는 여전히 과학만은 흥미가 있었다.
호기심이 강했던 나는, 중학교 때부터 천체만원경을 엄청 가지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나는 천체만원경을 갖지 못했다. 나는 천체만원경을 살 돈이 없었다. 어머니는 중학교 때부터 학교공부를 엄청 강요했기 때문에, 돈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천체만원경을 사주지 않으셨다. 과학자로의 길이 그렇게나 힘들었다니.
나는 비행선도 구상하려고 했다. 반 친구에게 엽총에 관해 들은 후, 엽총에도 관심이 있어 엽총을 만들려고도 시도했다. 반 친구는 30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납이 나무에 박혔다고 했다. 자전거의 뭐와 심, 화약, 고무줄, 나무, 납이 있으면 된다고 했다.
중학교 때도 나는 직접 탐구를 했다. 개미가 개미굴을 어떻게 파는 지도 알아보고 등등.
IQ 두 자리의 중등학교 시절4
학교공부에 마음이 없었던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사색을 하기 시작했다.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었다. 아주 본능적으로 사색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 땅에 빛을’이란 책에서 사색하는 신부님의 사진을 본 후로, 나의 무의식 속에는 사색이 자리 잡혀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색을 하겠다는 의식이 없이 순간적으로 사색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 땅에 빛을’이란 책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으로 나온 책으로, 1984년에 어머니가 사신 책이다. ‘이 땅에 빛을’이란 책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주교위원회’에서 발간했다.
사색을 처음 시작하게 된 때는 체육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하고 있는 게 사색인지 몰랐다. 다른 학생들은 운동을 했지만, 나는 혼자 운동장을 걸으면서 깊은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역시나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저것은 무엇인가?”식이었다. 내가 사색을 처음 시작했을 때, 반 친구들은 축구를 하고 있었다. 골대는 축구 골대가 아니었다. 핸드볼 골대였다. 대전중학교는 핸드볼이 유명했다.
중학교 때, 어머니는 머리가 좋아지는 것이라며 나에게 꿀과 인삼 가루를 뭉친 것, 소족, 우유, 잉어탕을 먹으라고 주셨는데(훗날에는 호두), 나는 잉어탕만은 빼놓고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잉어탕은 입만 대고 마지지 않았다. 잉어탕은 할머니를 드리라고 어떤 분이 주신 잉어를 물에 넣고 끓인 후, 한 컵 정도 나에게 주신 상태였다. 이전이나 훗날이나 ‘등 푸른 생선 반찬’도 주셨다. 초등학교 때는 고등어였고, 훗날에는 참치였다. 어머니의 나에 대한 정성은 아주 각별했다. ‘용의 눈물’을 본 사람이나, 최진실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믿을 건 자식뿐).
IQ 두 자리의 중학교 시절5
중학교 3학년 때, 아이템플이란 학습지에서 시 낭송 테이프를 두 개씩이나 줬다. 시 낭송 테이프에는 김광섭, 김소월, 윤동주, 한용운 등 국내 시인과 릴케, 예이츠, 타고르, 하이네 등 외국 시인의 시가 테이프 한 개당 ‘국내 시인의 시 10수, 외국 시인의 시 10수’씩 들어 있었다. 은은한 음악의 한가운데서 성우들이 좋은 목소리로 시를 낭송했다. 아주 마음에 들었다.
시 낭송 테이프는 나의 감수성을 키워줬으며, ‘수면중 아이큐 증가법’을 탄생시키는 데 도움을 줬다. 나는 시 낭송 테이프를 지금까지도 가지고 있다. 목숨보다 더 아꼈다.
훗날, 획일교육을 공격하는 데 사용할 수 있으리란 생각도 작용했다. 시 낭송 테이프를 받은 지 2006년으로 19년이다.
중학교 3학년 때, 나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혹시나 카세트테이프를 틀어놓고 자면, 카세트테이프의 내용이 꿈속에 나타나 나를 가르쳐 주지 않을까?”였다. 이를 떠올린 나는, 거의 매일같이 신약성서 테이프를 틀어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가 틀어놓고 잤던 공동 번역 신약성서 테이프는 ‘가톨릭 시청각 교재 개발원’에서 보급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신약성서 카세트테이프를 사신 때는 1984년이었다. 그 당시에 가톨릭 시청각 교재 개발원의 전화번호는 266-7887, 269-6722였다. 나는 요한의 묵시록의 내용을 두려워하면서도 계속 틀어놓고 잠에 들었는데, 이에 대한 보답인지, 충격대예언(안영배 저)에 인용된 격암유록의 내용 중 요한의 묵시록을 베낀 게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시 낭송 테이프를 틀어놓고 잠이 든 적도 있다. 마음에 드는 은은한 음악도 들렸다. 이도 훗날, ‘수면중 아이큐 증가법’을 탄생시키는 데 도움을 줬다.
신약성서 테이프에서는 신약성서의 내용만이 아니라, 일종의 배경음악도 흘러나왔다. 훗날, 제목을 알게 되었는데, 아다지오도 흘러나왔다. ‘요한의 묵시록’의 내용이 들어있는 테이프(17장~22장)를 틀어놓았을 때, 나의 귀에 들려온 좋은 음악이 있었는데, 나는 그 음악의 제목을 알지 못했다. 나는 그 음악의 제목이 궁금했다.
그 음악의 제목은, 그 음악을 들은 지 10년 뒤, 기적적으로 알게 되었다. 1997년 10월 19일, 한국의 축구가 한국에 다시 꿈을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던 다음날, 정명훈의 ‘청소년 음악회’에서 연주되고 있었다. 청소년 음악회가 시작되자마자, 정명훈이라는 지휘자가 피아노로 신약성서 테이프에서 흘러나왔던 그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97년 10월 19일, 마침내, 나는 그 음악의 작곡가와 제목을 알게 되었다. 그 음악을 처음 듣게 된 지 정확하게 10년만의 일이었다. 내가 ‘획일교육에 선전포고’를 한 지 7년만의 일이었다.
1987년에 내가 들은 그 음악의 제목은 다름 아닌 슈만의 꿈이었다. 슈만의 꿈 다음으로는 베르디의 ‘상투스’가 연주되었다. 그리고, ‘히브리안의 합창’도 연주되었다. 사회자는 “슈만은 어린이, 청소년들을 위한 음악을 많이 남겼습니다”라고 말했다.
IQ 두 자리의 중학교 시절6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성당에서 하는 교리경시대회에서 1위, 중학교 3학년 때는 성당에서 하는 교리경시대회에서 2위를 했다. 교리경시대회에서 1등을 해서 받은 조그만 피에타가 나의 책장 위에 있다. 그때 처음으로 나의 이름이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내가 1등을 한 사실을 주일 아침 10시 미사 때 백남익 몬시뇰(그 당시는 신부) 언급했다. 백남익 몬시뇰은 나의 큰삼촌과 요한 23세 교황의 양옆에 위치해 사진을 찍은 분으로 대전 엑스포 때 엑스포장에서의 미사가 끝난 후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퇴장을 한 성직자이다. 백남익 몬시뇰은 김지미(영화배우)씨의 결혼식 주례를 한 신부님으로도 알려져 있다. 나는 김지미씨를 1993년에 계룡대 골프장의 프론트에서 본 적이 있다.
어쨌든, 주위 사람들은 내가 정말 신부가 될지 알았다. 중학교 때도 신부 겸 과학자가 되려고 했었다. 이래서인지, 중학교 때는 성경책을 자주 읽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어린이 미사책을 매일같이 읽었다. 신부(神父)처럼 읽었다.
나는 성당 생활을 참으로 열심히 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소년 레지오의 부단장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복사를 했었다. ‘복사’란 신부(가톨릭 성직자)가 미사를 집전할 때, 신부(가톨릭 성직자)의 옆에서 미사 예식을 도와주는 사람(주로 어린이)을 가리킨다.
IQ 두 자리의 중학교 시절7
연합고사가 끝난 후 며칠 뒤, 학교에서 본 영화가 있었는데, ‘리셀웨폰’이었다. 중학교 3학년 학생들 거의 다 봤다. 예쁜 유방에다 배꼽도 나왔는데, 목욕탕인지 타월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포르노가 아니었으므로 여자 성기는 나오지 않았다. 조금만 밑으로 내려갔다면 여자의 음모(陰毛)까지 나왔겠다. 여자의 가슴은 큰 편이었다. 미성년자불가였다. 아마도, 성인물을 좋아하는 학생이 빌려왔겠다.
한 번은 홍콩영화 비디오 테이프였다. 여자가 알몸으로 도망가는 장면까지. 알고 보니, 영화를 하기에 앞서 포르노 테이프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상태였다. 여자 치마가 위로 올라가는 내용의 경우, 조금만 더 위로 올라갔다면 성기도 보일 가능성이 있었을 정도여서 학생들은 기대를 많이 했겠다. 분명히 팬티를 입지 않았을 것이다. (지연시간 2초).
세상에나! 조금만 더 위로 올라가지. “여자 다리 사이의 것은 어떻게 생겼을까?”라고 생각한 학생도 있었을지 모른다. 내용은 별로였지만,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요즘도 미성년자에게 성인물을 대여하는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은 많겠다.
학생들이 학교에 누드, 포르노 잡지나 책을 가지고 오는 경우가 있었다. 호기심에 나도 봤는데, 중학교 2~3학년 때부터 신부가 될 수 없는 싹이 자랐나 보다. 참고로, 나도 본 잡지 중에 여자 성기가 나온 사진은 없었다.
IQ 두 자리의 고등학교 시절 1
고등학교 1학년 때, 작문사건이 일어났다. 중간고사 후로 내가 답한 글(주관식)을 반 학생들에게 읽어 주며 “정말 잘 썼어!! 정말 잘 썼지?”를 큰 소리로 연발하며, 큰소리로 “만점!”이라고 하며 만점을 줬던 선생이, 다음 번 작문 시간에는 객관식 점수로 나를 깔아뭉갰다. “변성재가 누구야? 앞으로 나와!”, 전교에서도 너보다 형편없는 놈은 없다며, 우리 반 학생들 앞에서 망신을 줬다. 한국에서는 이런 황당한 일도 일어날 수 있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롱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조롱해라. 나는 획일교육의 추종자들에게 조롱 받을 그릇밖에 되지 못했다. 이 얼마나 치욕인가! 그래, 50점 만점에 16점(주관식+객관식)을 받았다. 얼마든지 조롱해라. 정작 내가 조롱 받아야 하는 것은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존재한다는 사실뿐이다.”
이렇게도 대들지 못했다. 굴욕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의 한(恨)만 남았을 뿐이다. 에디슨이 한국의 중학교,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있으면 바보가 된다는 말이 있다. 글쓰기는 전교 1등이었지만, 객관식은 전교 꼴찌였나 보다.
사이코 선생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 작문 선생은 국어 선생이기도 했는데 랭보를 시로 이끈 이장발이나, 악성(樂聖) 베토벤의 스승인 네페로 선생의 그릇 크기도 되지 못하겠다. 신경림 시인의 국어 선생님은 신경림 시인이 국어 시험지를 백지로 내자, 시 다섯 수로 점수를 대신해 주겠다고 했다. 신경림 시인이 고등학교 2학년일 때의 일이었다.
나는 노벨 물리학상뿐만 아니라, 노벨 문학상으로의 접근까지도 상대적인 타격을 받았다. 랭보의 스승인 이장발이 나의 작품을 평가했다면 나의 재능을 키워주려고 했겠다. 그래도 훗날, 나는 노벨상을 3~4번 수상할 수 있을 정도의 업적을 꿈꿨다. 노벨 문학상, 노벨 물리학상, 노벨 생리․의학상,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수 있을 정도를 꿈꿨다. 획일교육을 완전히 파멸시킬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처량하게도 노벨 문학상 정도를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노력이 있어야 가능성이 보일까 하겠다. 내가 노벨상을 꿈꿨던 이유 중의 하나는, 획일교육을 침몰시키고 싶었다. 제 아무리 획일교육이 기고만장하다고 해도, 한민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앞에서는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나는 20대 후반의 노벨 물리학상을 꿈꿨다. 부러졌지만 말이다.
분야는 다르지만, 나는 한국에서 아인슈타인, 에디슨이 나올 수 없는 이유를 경험으로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없다고 투덜거리지만, 노벨상의 가능성이 보이는 사람들을 완전히 병신 취급하며 재능을 죽이려고 안달인데, 토마스만 같은 사람이 버틸 수 있을까.
획일교육의 무리가 창의성의 존재를 앞설 수 있는 것은 ‘한국의 학교 시험 문제를 잘 푼다’ 정도겠다. 은유법, 직유법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나보다 더 잘 알 테지만 상상력, 연관능력을 바탕으로 하는 창조력에서는 나를 상대하기가 벅차겠다.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란 영화를 봐도 알 수 있다.
1999년 10월 12일 밤 10시 35분 경, KBS1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를 방영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선생님이 나온다. 이론보다는 실제를 가르친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생각된다. 키팅 선생님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시청자가 뽑은 다시 보고 싶은 영화 50’중에서 열네 번째에 오른 영화로, 1990년에 제작되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란 영화의 주연은 로빈 윌리엄스, 에단 호크, 로버츠 숀 레너드이며, 감독은 피터 와이어다.
KBS2에서는 1997년 10월 18일 밤 10시 00분 경, ‘쇼생크 탈출’이란 영화를 방영했다. 주인공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다, 마침내는 탈옥을 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쇼생크 탈출은 팀 로빈스, 모건 프리먼 주연이다. 내가 쇼생크 탈출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쇼생크 탈출’에서 의미심장한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냄새나는 하수구를 기어나가 희망의 낙원을 찾아가는 것이다. 새가 하늘 높이 날고 싶어 하는 것을 빼앗는 것은 틀림없는 죄악이다.” 이를 다음과 같이 바꿀 수도 있다.
“냄새나는 하수구(한국의 중․고등학교)를 통과해 희망(꿈)을 찾아 나선다. 날고 싶어 하는 새(어린이, 청소년)의 희망(꿈)을 빼앗는 것은 틀림없는 죄악이다.”
쇼생크 탈출은 ‘시청자가 뽑은 다시 보고 싶은 영화’ 중 제19위에 오른 영화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가 방영된 지 6일 만에 방영된 쇼생크 탈출은 의미심장하다. 한국의 중학교, 한국의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당할 수밖에 없었던 치욕이었다.
IQ 두 자리의 고등학교 시절 2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미국으로 망명하는 것을 꿈꿨다. 한국의 교육제도는 너무 싫었다. 지금으로 하면 아메리칸 드림이겠다. -코리언 드림은 없었다. 누구든, 한국을 코리언 드림(COREAN DREAM)의 나라가 되게 하는 데 힘써 주셨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미국으로 망명할 수 없었다. 세계적인 업적이라도 있어야 외국으로의 망명을 꿈꿀 수 있었는데, 입시교육으로부터 꿈과 시간과 창의성이 엄청난 타격을 받았던 수준에 세계적인 업적을 기대할 수 없었다. 미국으로 갔다면, 과학자로의 꿈을 가지면서 미국의 상원의원을 꿈꿨겠다.
획일교육의 무리에게 짓밟힐 대로 짓밟힌 나는 힘을 갖고 싶었다. 나는 주로 기관단총, 기관총, 대나무, 로봇, 미사일, 바추카포, 우주선, 야포, 전투기, 전투헬기, 전함, 창, 총, 칼, 탱크, 폭격기, 항공모함, 화살, 활 등을 그렸다. 어쩌면, 이는 나의 내면을 표현한 상태라고도 할 수 있었다. 청소년들은 힘이 없었기 때문에 획일교육의 무리에게 치욕스럽게 짓밟혔다. 실력으로 보나, 업적으로 보나 대단하지 못한 사람들이 학교성적만으로 모든 것을 평가했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획일교육과 열심히 작당하여 자녀들의 재능을 짓이겨 버렸다. 이는 청소년들이 힘이 없었기 때문에 당한 굴욕적인 치욕이자 패배였다.
시험을 보는 중에도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여기에 기록된 내용이 전부는 아니다. 나는 시험을 보기 전, 소화불량을 일으킬 때도 있었다. 괜찮았던 배가 시험 시간 바로 전부터 아파 왔다. 몇 번 이랬다. 신경성인지, 시험을 보는 날, 설사를 할 때가 있었다. 역시나 초등학교 4학년 때, 신경성 위장염으로 고생을 하던 게 생각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과목은 집중을 했지만, 싫어하는 과목은 딴 생각을 하며 철저하게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IQ 두 자리의 고등학교 시절 3
랭보에게는 이장발이, 나에게는 영진이 형이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영진이 형을 처음으로 만났다. 영진이 형은 목원대 불문과 학생으로 대전상업고등학교 출신이었다. 이러한 영진이 형이 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상고를 졸업한 후 은행에 취직했다.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성실함을 보여주고 더 능력을 보이는데도 서울상대 출신에게 진급도 다 빼앗겼다. 더군다나,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다. 온갖 서러움을 다 받았다. 그래서, 울분에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충남대를 갈 수 있는 실력이었지만, 집안이 가난해서 장학금으로 다니기 위해 목원대 불문과를 택했다. 나는 한 번만 빼놓고 모두 장학금으로 다녔다.”
영진이 형이 나의 과외 선생으로 있을 때, 나에게 해준 말이 있다. “성재야, 여자가 어떤 남자에게 반하는 줄 아느냐? 여자는 말이야,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남자에게 반한단다. 능력이 있는 남자에게는 여자가 우리 집에서 대전 시청까지 줄을 선단다. 외모가 아무리 형편없다고 해도 말이야.” 이는 내가 짝사랑으로 고민할 때, 영진이 형이 나에게 해준 말이다. 나의 어머니가 영진이 형에게 고자질했다. 그 당시, 나는 연상의 여자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그 누나를 “보누”라고 했다.
이는 훗날의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졌다. 그 누나의 여동생이 나와 동갑인데, 9년 뒤(1998년)부터 일주일에 한두 번은 공적인 일로 꼭 보게 되었다. 그 누나의 여동생은 나에게 수동적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나는 대인관계에 있어서 좀 수동적이다. 특히 여자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더 수동적이 된다. 좋아하지 않는 이상, 접근을 거의 하지 않는다. 나는 적극적으로 나오는 여자에게는 약해서 완전히 말려들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이상, 아주 피하는 편이다. 전부 아니면 전무였다.
영진이 형은 나에게 신부가 되라고 했다. “너는 신부가 어울려”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신부가 되는 것에 반신반의(半信半疑)했다. 내가 성직자가 된다면 성(聖) 아우구스티누스나 이창덕 신부 정도가 될 수 있겠다.
내가 길거리에서 불량배에게 맞을 때, 아무도 구해주지 않았다고 하며 미국이나 호주로 가겠다고 하자, 영진이 형은 나에게 “외국은 더하다”며 한국은 안전한 나라라고 강조한 후, 한국에서 살라고 했다. 그러면서 계속 나를 달랬다. 나는 미국에 가면 자동소총부터 살 생각이었다. “한국의 기성세대는 믿을 수 없다. 내 몸은 내가 지킨다”는 각오였다.
대낮에 큰길에서 불량배에게 맞는데도 사람들 모두 모른 체 지나가는 상황에서 한국 사회와 한국 기성세대들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대낮에 큰길에서 불량배에게 맞는데도 사람들 모두 나 몰라라 한 상황을 당한 심정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겠다. 기가 막혔다. 불량배는 모두 세 명이라 대들지도 못했다. 그 당시는 ‘1대 1도 이길까 말까’였다. 킥복싱을 배우지 못한 게 한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여름방학 보충수업을 받고 오던 중이었다. 나는 미국으로 갈 수 없다면 호주로라도 가고 싶었다. 한국은 꿈을 이루는 데도 장애가 되는 나라였다.
그처럼 호주로라도 가고 싶다는 마음은 간절했지만, 이번 경우는 영진이 형의 말에 참기로 했다. 영진이 형은 나에게 있어 친형이나 다름이 없었다.
IQ 두 자리의 고등학교 시절 4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폭력에 시달렸다. 야간 보충수업이 끝난 후,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려고 버스 정거장으로 가다, 불량배들 중 하나에게 코의 왼쪽을 강타 당했다. 불량배들에게서 벗어난 나는, 쌍 코피를 흘리며 학교 쪽으로 100~200m 정도를 걸어왔다. 처참하게도 길은 나의 코피로 예술 작품이 되었다. 훗날에도 내가 힘이 없었기 때문에 당했다는 생각을 뼈저리게 했다.
몇 주 뒤 알게 되었는데, 나를 때린 사람은 같은 학교 1년 선배였다. 그는 3학년에게도 그런 식으로 하다, 자신이 때린 선배에게 잡혀, 3학년 선배들에게 엄청나게 얻어맞았다. 얼마나 얻어맞았으면 교련 선생님을 찾아가 “선배들에게 얻어맞아 방문을 넘기도 힘들어요”라고 하소연을 했을까. 업보일 게다. 나는 그를 너무 증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역시 획일교육의 희생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밖의 학교폭력에도 시달렸는데, 나는 심리학자, 정신병리학자와도 상담을 하지 못했다. 선생님과도 자발적으로 상담하지 못했다. 내가 상담하지 못한 이유는 분노, 울분으로 미처 상담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겠다. 사실, 나는 나의 마음을 잘 털어놓지 못하는 편이었다. 학교폭력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부모에게 자신이 당하는 일을 모두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10년 이상을 학교폭력의 후유증으로 고생할 수 있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얘기가 있다. 학교폭력․유해업소 신고 상담은 ‘전국공통 1588-2828’이다.
상담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생물 선생님과 한 번이 있었을 뿐이다. 그때는 내가 수업시간에 분노와 울분으로 흥분을 했기 때문에 상담을 하게 되었다. 쪽지에는 “천주님은 내가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아실 것이다”라고 쓰여져 있었는데, 이를 생물 선생님이 보셨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상담을 하게 되었다. 생물 선생님은 좋은 분이셨다.
그나마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고등학교 중에서는 괜찮았다. 다른 학교의 경우, 선생에게 말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한다. 선생들은 은폐하기에만 급급하다고 한다. 학교의 명예가 실추된다며 벼리별 얘기를 늘어놓지만, 그런 상태는 매독을 숨기는 상태와 다를 바 없다. 매독에 걸린 사실이 공개되면 명예가 실추된다. 그러나, 명예가 실추된다 하여 매독을 숨기기만 하면 1기로부터 4기에 도달하여 반신불수, 실어증에 걸린다. 이후로는 사망이다. 학교의 명예가 실추된다는 웃기지도 않은 얘기를 늘어놓지만, 그런 상태는 부끄러워 치료를 받지 않은 채, 매독을 숨기기만 하는 상태와 다를 바 없다. 썩은 부위는 과감하게 잘라야 한다. 그래야, 생명에 지장이 없다.
교육은 참된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점(전인교육)에도 있어 한국의 중등교육제도는 성병보다 더 지저분하다. 창녀가 오히려 한국의 중등교육제도보다 깨끗하겠다. 야간 타율학습으로 시달림을 받던 선생님들, 학생들이 불쌍할 따름이다. 야간 당직을 제외하고, 선생님들은 오후 4시만 되면 모두 퇴근해야 한다. 선생님들은 야간 당직을 제외하고, 오후 4시 이후로는 학교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주 5일만 근무하면 된다. 월급은 150만(~200만)원 정도면 된다. 토요일에는 돌아가며 몇 분만 남아서 학생들의 재능별 독서를 감독하면 된다.
학교폭력도 그렇고, 도저히 한국의 교육제도에 적응할 수 없었던 나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자고 여러 번 어머니께 청했다. 그러나, 잔인하게도 어머니는 나의 바램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미국에서는 할게 없다는 게 이유였다. 사실, 나의 어머니는 한국에서 살고 싶어 했다.
미국에서 작은아버님이 슈퍼마켓을 하고 계셨다. 슈퍼마켓 일을 도와 드리면서 나의 꿈(과학자)을 이룰 수 있었는데, 나의 어머니는 오로지 학교성적으로 남을 이기기만을 바랬다.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릴까. 아니면, 염산이라도 마셔볼까.
그러나, 나는 자살을 선택하지 못했다. 자살을 선택하지 못한 이유는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옥에 가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기에 겁을 먹었던 상태였다. 결국, 완전히 열이 뻗치지 않은 이상 자살을 선택할 수 없는 처지였다. 물론 죽더라도 획일교육의 멸망을 보고 죽고 싶었다.
어쩌면 나에게 종교가 없었다면,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 이미 죽음을 택했겠다. 왕따를 당하는 학생들에게 종교생활은 필수이다. 종교인들은 왕따를 더 사랑해 준다. 더 어울리려고 한다. 찾아오는 버림받은 한 마리의 양을 버림받지 않은 99마리의 양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버림받지 않은 99마리의 양이 버림을 받았던 한 마리의 양에게 정성을 쏟는다. 자살하려는 학생에게 종교가 생긴다면 쉽게 자살하지 못하겠다. 종교인들을 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종교가 없는 사람보다는 있는 사람이 그래도 좋은 점이 많다. 종교로 가장하는 사이비는 종교가 아니다.
나 같은 경우 왕따는 아니었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여러 얘기를 나누곤 했다. 반 친구들은 아주 괜찮았다. EQ가 높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어디를 내놔도 손색이 없다. 고등학교 때, 나는 좋은 친구가 많았다. 이는 그나마 큰 위안이 된다.
IQ 두 자리의 고등학교 시절 5
내가 시조를 써서 영진이 형에게 보여줄 때, 영진이 형은 남이 써논 시조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하면서 이왕 시를 쓰려면 자유시를 쓰라고 했다. “김현이라는 사람을 아냐?”라고 하면서. 김현은 서울대 불문과 교수로 김현에게 작품을 평가받은 사람은 사회에서도 알아준다고 했다. “고작 서울대 불문과 앵무새!” 그 당시, 나는 김현을 알지 못했다.
1996년에 김현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는데, 소설을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 알게 되었다. 그는 200여 권의 소설을 읽었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문학평론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나보다 한 살이 어렸다.
내가 만화책을 읽는다는 사실에 굉장히 어이없어하던 영진이 형은 나에게 ‘탈무드(마아빈 토케이어)’란 책을 줬다. 그때부터 나는 유태인에게 엄청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훗날(1991년), ‘유태인의 천재교육(루스 실로)’이란 책을 사게 만들었다. 나는 유태인의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유태인의 천재교육’이란 책은 나에게 여러 도움을 줬다. 내가 이미 실행한 방법도 있었다. 영진이 형이 준 ‘탈무드’란 책이 여전히 나의 책장 속에 꼽혀 있다.
나는 유태인, 일본인의 특성을 알게 된 후로는 최소한 50년 앞을 내다보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정신적인 고구려인, 정신적인 게르만, 정신적인 유태인이라고 생각하며, 나의 의식 수준을 그들의 수준에 맞추려고 노력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한국 기성세대들의 의식 수준을 아주 경멸했다.
나는 피히테와 가르발디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교련책에, 피히테와 가르발디에 대해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구려의 정신은 유태인의 정신, 프로이센 정신에 절대로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후, 나는 고구려의 정신을 부활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IQ 두 자리의 고등학교 시절 6
모두 다 20점이면 왜 체력장 검사를 했을까. 학생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줘야 할 학교에서 오히려 남을 속이는 것을 가르치는 뭐 같은 무리가 설쳤으니, 한국에서는 허구한 날 위선과 사기가 판을 친다. 저울을 조작하는 자, 병에 걸린 개고기를 파는 자, 국민을 기민하며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자들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닌다. 119아저씨들이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데, 서울 시청 6급 공무원의 재산이 200억(원)이었다.
체력장 검사뿐만 아니라, 자율학습은 타율학습이었다. 타율을 자율로 배우는 학생들의 무의식에 잘못된 가치관이 자리 잡히는 게 당연하다.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타율은 타율일 뿐이다.
타율학습 시간에 과학책이나 소설책이나 학생 본인이 좋아하는 책을 읽게 해주는 게 학교공부를 강요하는 것보다 좋겠다. 보충수업 시간에도 마찬가지다. 보충수업을 좋아하는 학생이나 보충수업을 받고, 그렇게 않은 학생들은 조용히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만화책을 읽어도 된다. 보충수업 시간에 과학동아나 월간과학 뉴턴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또는 읽게 하는 게 훨씬 좋겠다. 암기 잘한다고 성공하는가! 한국의 고등학교는 학교가 아니다. 학교라기보다 ‘한국 대학(직업훈련소) 입학시험 기술훈련원’이다.
여름방학 때, 보충수업을 한다며 교회(성당, 절)에서 하는 수련회에 가지 못하게 하던데, 한국의 중학교, 한국의 고등학교 생활보다 교회(성당)에서 하는, 또는 절에서 하는 청소년 행사가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괴테가 에디슨이 처칠이 평가해도 지극히 옳은 얘기이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아주 독실한 개신교 신자 학생이 여름방학 때 하는 보충수업을 이삼일 정도 하지 않고 여름성경학교에 갔다 왔다. 몽둥이로 얻어맞았다. 이런 상태에서 인성교육이 될 리 만무했다. 입시가 여름성경학교에 갔다 온 학생을 팰 만큼 대단했나 보다.
서울대가 그렇게 대단한가! 거기 나오면 역사상 10대 천재가 되나! 나의 꿈인 이상, 인류 역사상 10대 천재가 되게 해준다면 서울대에 들어갈 마음이 0.01%는 생길 수도 있을 텐데. 나의 내신은 8등급이다.
솔직히 나는 서울대 간판 따위는 필요 없다. 서울대 간판이 있다고 괴테를 능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 빈치에게 접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인간성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서울대를 들어가는 공부를 할 바에는 다른 것을 하겠다. 주력 예언시 ‘자르크 버전 2.0’이나 완성하련다. 자르크 버전 2.0은 복수(複數)풍을 따를 생각이다. 여전히 머리에서만 맴돌고 있다. 먼저 하던 일을 마친 후, ‘자르크 버전 2.0’의 체계를 완벽하게 잡아야겠다.
IQ 두 자리의 고등학교 시절 7
어떤 선생은 3년 내내 서울대 찬가를 애창하며, 학교성적이 저조한 학생들을 괴롭혔다. 서울대가 대단했나 보다. 성적이 저조한 학생들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죽이려고 하게. 이런 상태 속, 나는 한국의 교육제도에 엄청나게 반발했다. 그걸 교육이라고 하나!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나는 전교조를 지지하게 되었다. 전교조가 탄생하자마자였다. 전교조는 1989년 5월에 결성되었다.
나는 한국의 교육제도를 비판하는 방을 붙이려다, 붙이기 전에 지구과학 선생님께 걸렸다. 여름방학 보충수업 때였다. 지구과학 선생님의 책상 앞에 담임선생님이 계셨다. 어떻게 하다 나의 입에서 전교조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지구과학 선생님은 “선생님들 절대로 전교조 지지하지 않는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나는 사상이 불순한 자로까지 몰렸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한국의 교육제도가 이상한 것이겠다. 이번 일로 나는 담임선생님께 몽둥이로 두 대를 맞았다. 맞은 부분은 장딴지였다. 담임선생님은 나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나를 심하게 혼내지 않으셨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담임선생님이셨기 때문에, 나는 맞은 것에 대해 언짢게 생각하지 않았다.
최호규 선생님은 고등학교 1학년,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셨다. 담임선생님 중에서 내가 최고로 좋아했던 선생님은 최호규 선생님이다. 최호규 선생님은 공업을 담당하셨다.
최호규 선생님은 학생들을 학교성적으로만 평가하지 않으셨다. 학교성적으로만 학생들을 지도해야 한다는 것에 가슴아파하셨던 분이다. 몸이 뚱뚱하셨다. 뚱뚱한 선생님들 치고 인성이 나쁜 선생님은 거의 없었다. 최호규 선생님의 별명은 ‘뽀식이’였다.
하여간에, 최씨는 사람이 좋구나. 훗날, 장가를 간다면 최씨에게 가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최씨 여자 앞에서는 기가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중요한 이유이다. 특히, 최씨 집안의 셋째 딸이라면 경외감까지 가진다. ‘최 진사 댁 셋째 딸’이란 노래까지 가미되어, 별로 예쁘지 않더라도 마찬가지다. 현재는 이씨 여자를 좋아하고 있다. 이영애 말이다. 이영애와 결혼하고 싶다.
서울대를 찬미하며 학교성적이 좋지 못한 학생들을 멸시하는 것은 다른 고등학교도 마찬가지여서,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선생님들만 문제시할 수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나는 퇴학이나 자퇴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퇴학을 당하거나 자퇴했어야 했는데, 엄청난 실수를 했다. 나는 학생들을 선동하려고 했기 때문에 담임선생님이 아무리 애써도 퇴학이 가능한 상태로 갈 수 있었다. ‘한국의 학교 교육은 디스켓 카피식 교육에 불과하므로 쓸어버려야 한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최호규 선생님, 이창기 선생님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퇴학이나 자퇴를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 부모 때문에 자퇴를 하지 못했다. 부모가 자퇴를 허락할 정도였다면 상황은 달랐겠다. 나의 부모도 다른 부모와 다를 바 없었다. 나를 비롯해, 청소년들은 무장 해제 당한 상태와 다름이 없었다.
나는 학교성적이 저조한 학생들을 바보, 병신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반발해 단전호흡, 뇌만 돌아가는 상태의 시도, 마인드 컨트롤 비슷함, 아인슈타인 등의 사진을 본 후 스타일 흉내내기 등을 했다. 특히, 맑은 공기를 머리로 보내기 위해서 산 쪽을 향한 후 숨을 깊이 들이켰다. 그리고, 내뱉을 때는 천천히 음미하면서 내뱉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는 맑은 공기를 머리 쪽으로 보내기 위해서 애를 썼다. 이를 일주일에 몇 번이고 반복했다. 사색할 때 주로 했다. 이는 훗날, 신도안에 있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머리로 많은 피를 보내기’도 한 적이 있다. 위험한 시도였다. 나는 초능력, 본격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마인드 컨트롤에도 관심이 많았다. 훗날에는, 중국인들이 아침마다 하는 태극권 동작을 흉내 내기도 했다.
획일교육에 분노한 상태에서 별짓을 다했다. 내가 별짓을 다한 이유는, 나 자신이 획일교육을 향한 공격용 무기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나는 획일교육을 파멸시킬 공격용 무기가 되고야 말리라. 나의 마음을 다하여, 나의 목숨까지 다하여 획일교육을 반드시 침몰시키리라.”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주로 학교 주위를 뱅뱅 돌면서 사색했다. 생각의 수준도 발전했다. 내가 학교 건물 주위를 걸으면서 사색할 때, 담임선생님(최호규 선생님)이 나에게, “성재야, 사색하니?”라고 물으셨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버스 안에서는 명상을 하기 시작했고, 반에서는 즉석토론을 하는 것도 즐겼다. 학교공부보다 유익했기 때문이다. 나는 과학과 통일교에 관한 얘기도 주고받았다. 나는 문선명의 수준을 어느 정도 직감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한민족 우월기인 태상기(太上旗)까지 구상하며 통일한국, 중국, 일본의 삼국동맹을 떠올렸다.
나는 한국의 1인자, 2인자도 꿈꾸었다. 한국의 1인자나 2인자가 되어 획일교육을 쓸어버리겠다. 사실, 나는 대통령감이 아니었다. 나는 장량, 제갈량, 정도전, 한명회처럼 2인자 정도의 그릇이었다. 나는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자주 상상했다. 김대중이라면 잘못된 교육제도를 파멸시킬 수 있을 것이며, 통일한국의 초석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훗날에는, 김대중이 통일한국의 아버지가 되기를 원했다. 훗날에는,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해 줄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도 했다. 요즘은 위징, 주은래, 정도전 정도 꿈꾸고 있다. 신숙주는 되지 않겠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김종필이 국무총리가 되면 좋겠다는 식의 생각도 했었는데, 이루어졌다. 나의 생각에서 김대중이 1인자, 김종필이 2인자, 내가 3인자 내지 5인자로 자리 잡혀 있었다. 상상일 뿐이었다.
나는 당을 창당하고 싶었다. 나는 내가 창당할 당의 이름을 ‘청년대한당’으로 정했다. 나는 청년대한당을 창당한 후, 2인자를 하려고 했다. 나는 1인자의 그릇이 아니었다. 내 그릇은 내가 더 잘 안다. 나는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재상도 되고 싶었다. 변영태 총리와 장면 총리를 닮고 싶다.
IQ 두 자리의 고등학교 시절 8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수학을 다시 시작했다. 왜냐하면, 수학에 다시 재미가 붙었기 때문이다. 획일교육 때문에 한동안 수학마저 멀어졌을 뿐이지 수학에 재능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나는 공간적으로 사고하려고 했다. 공간도형 부분에서는 공간적으로 주위부터 살폈다. 교실의 모서리와 주위를 연결하며 여러 형태를 떠올렸다.
꿈에서 나는 누워있는 상태로 우주를 떠돌고 있었는데, “나는 빅뱅으로 우주가 탄생했는가?”를 묻고 있었다. 이는 의식이 약간 있던 중의 꿈이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사실이나 아이디어를 꿈에서 얻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혹시나 해서 우주를 누운 채로 떠돌아다니는 꿈을 꿀 때, “우주의 탄생은 빅뱅일까, 아니면 다른 것일까?”를 물은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나는 빅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빅뱅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의 정신이 물질에서 진화해 왔다는 가설을 뒤집으면, ‘물질이 정신으로 진화한 것처럼 정신도 물질로 진화할 수 있으므로 무한대의 정신능력인 하느님이 물질을 만든 것도 타당한 게 된다’에 직면할 수 있다. 빅뱅을 인정하면, 돌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정신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게 된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시간이 멈추면 물질의 정신으로의 진화도 멈추겠다.
물질 하나가 지금과 같은 상태까지 저절로 진화해 왔다면, 초기의 물질은 저절로 진화를 위한 데이터를 지니고 있었을까. 컴퓨터의 경우처럼 초기점은 하드웨어라고 할 수 있는 물질과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는 진화 데이터로 형성되어 있었을까. 이 점만으로 하면, 초기점은 영혼과 육체의 인간과 별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사람보다 초기점의 힘이 더 강력하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마침내, 초기점은 신과 통한다. 하느님이 초기점을 만들어 지금과 같은 세상으로 발전하게 했다면, 하느님의 능력은 성경의 천지창조능력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고 할 수 있겠다. 만물을 일일이 만드는 것보다 하나의 물질에서 지금과 같은 상태로 발전하게 하는 게 더 어렵겠다.
우주가 밀도공간(密度空間)이라면 우주 밖은 무밀도공간(無密度空間)이 아닐까. 이렇다면, 우주는 계속 팽창하거나 우주와 우주 밖의 밀도가 같아지면 팽창을 더는 하지 않겠다. 우주의 밀도가 우주 밖의 밀도보다 크기 때문에 우주가 커진다는 밀도설(密度設)도 일리가 있다. 이에 의거해, 인류는 무한 팽창을 하더라도 무한히 살 수 있는 터전이 계속 마련되는 것이다. 은총이겠다.
버스 안에서는, 앞에 가는 차와 내가 타고 있는 버스를 떠올리며 상대속도를 생각하기도 했다. 내가 탄 버스의 상대속도는 앞에 가는 차의 속도와 내가 탄 버스의 속도 차이였다. 나는 이론만의 교육에는 질색이었다. 직접 확인하거나 적용해야 마음이 놓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공식 유도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이려고 하고 있었다.
물리 시간, 칠판을 보고 있을 때, 나는 발견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직감했다. 후로, 나는 퀴리 부인, 채드윅을 꿈꾸며 물리학과를 가려고 했다. 물질을 발견해도 노벨 물리학상을 주는구나! 잘하면 20대 후반 또는 30대 초반에라도 노벨 물리학상을 탈 수 있겠다. 부러졌지만, 가능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반중력에도 관심이 많았다. 물리학과를 가면 반중력에 관해서도 파고들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반장에게 “양성자는 있는데, 양성자의 반대되는 물질은 왜 없을까?”식의 엉뚱한 질문을 했다. 빛이 있으면 어둠, 양성자가 있으면 음성자도 있어야 하는데, 아니면 비슷한 물질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음의 물질은 왜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물리 시간에 엉뚱한 질문을 했는데, 물리 선생님은 친절하게 답변해 주셨다. 양성자와 중성자의 관계에 관한 질문이었다.
심령에너지 차원적 등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생각했다. 증명시키지는 못했지만. 심령에너지 차원적 등가란, ‘아이큐 등 인간의 정신능력은 차원이 증가하면 할수록 증가한다’는 가설이었다. 곧, 차원은 인간의 정신능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설이었다. 정신 에너지를 E로 놓으면 E는 차원 D에 영향을 받는다. 나는 물질만 추구하는 수준에는 반감이 많았다. 그래서, 정신과 물질을 통합하는 이론을 창시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이젠 나이가 너무 많아서 접어둬야 한다. 과학은 젊은 학문(學問)이다.
과학자들이 우주로는 잘 뻗어 나가니, 나는 여전히 미지인 인간의 두뇌를 파고들고 싶었다. 이래서 나온 게 ‘심령에너지 차원적 등가’란 가설이었는데 내가 심령 에너지 차원적 등가를 이론으로 정립했다면, 나는 특수양대성이론의 창시자로 남았겠다. 인간의 영혼이 인간의 육체를 지배하는 과정을 수식으로 남기고도 싶었는데, 이도 늙어서 가망이 없다. 수학은 최대 25세까지는 완벽하게 잡아놔야 한다.
쉬는 시간, 내가 교실에서 왔다갔다했을 때, 에디슨이라고 불리는 반 친구가 반 학생들을 모아놓고, 종이에 그려진 동그라미에 볼펜을 넣은 후 밖으로 빼내면서 “이게 뭐냐?”고 묻고 있었다. 그 친구의 주위로 모여 있던 반 친구들은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공간 이동”이라고 했다. 나는 버스가 이동하는 것도 일종의 공간 이동이라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 친구는 나의 말에 “공간 이동이다”라고 주위의 친구들에게 말했다. 여러 친구들이 맞추지 못한 문제를, 남이 가르쳐 주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한 번에 직감적으로 맞췄다. 그 문제를 낸 친구는 아무도 맞추지 못하리라고 생각했겠다. 그때, 나는 아인슈타인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일은 나의 직감력이 돋보인 상태였다.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서울대를 들어간 반 친구는 나의 대답에 “어떻게 알았냐?”며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우리 반은 서울대를 들어간 사람도 최소한 이 정도였다.
너무 늦었지만,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수학반에 들어갔다. 전교 몇십 등 안에 들어가는 학생들과 함께 수학을 공부했는데, 수학반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서강대, 한양대 등 소위 한국에서만 일류인 대학을 지원할 학생들을 위한 수학에서의 최종실력 점검이나 다름이 없었다. 수학 수준은 아주 높았다. 그래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수학이 최고로 좋았다. 수학은 기계적인 암기 과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극한, 미적분 등은 확실히 따라갈 수 있었는데, 벡터와 공간도형은 좀 어려웠다. 요즘은 기하 쪽이 좋아졌다. 중학교 수학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때도 있다. 수학도 기초가 아주 중요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수학을 공주사대 화학과를 나온 여자에게서 과외를 받았다. 앞서가려고 했기 때문에, 과외 선생에게 혼나기도 했다. 수학을 함으로써 나의 능력은 좀더 향상되었다.
나는 화이트홀은 방출만 하지 않을 것임을 상상했는데, 이는 막대자석의 원리를 블랙홀, 웜홀, 화이트홀에 적용시킨 상태로, 좋은 말로는 연관능력이며, 심한 말로는 논리적 비약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언젠가, 어항을 보니 기포가 여러 개 있었다. 이로부터 나는 “우주가 하나밖에 없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저 기포가 우리 우주라면 다른 기포는 또 다른 우주가 아닐까.
수학을 늦게 시작한 나는, 이론물리학보다는 ‘관찰물리학’과 ‘천체물리학’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배재대 물리학과를 시험 봤다. 역시나 불합격이었다. 처량하게도 나는, 4년제 대학을 들어가는 사람들의 박수부대에 불과했다. 물리학과는 간판대가 아니면 밥 빌어먹기 힘들다지만, ‘나는 발견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에, 제2의 마리 퀴리, 제2의 채드윅이 되기 위해서 물리학과를 지원한 상태였다.
이 나라 사람들이 간판대 물리학과만을 알아준다고 해도 채드윅, 마리 퀴리와 키 재기를 한다면 당연히 채드윅, 마리 퀴리가 크게 보인다. 왜냐하면 상대성이론을 아인슈타인보다 더 잘 이해한다고 해도 상대성이론의 창시자인 아인슈타인만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남달랐던 관찰력, 발견능력, 분석력, 직감력, 통찰력 등을 살리고 싶었다. 관찰력, 발견능력, 분석력, 직감력, 통찰력은 다 빈치, 뉴턴에게도 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상상력과 연관능력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그런데, 한심스럽게도 박수부대에 불과했다. 이런 상태일 때, 어떤 선생이 대학입시에 실패한 학생들을 병신 취급했다. 자기가 잣대로 재서 보낸 학생이 목원대 사회학과에 합격했다며, 대학 입시에 실패한 학생들을 병신 취급했다. 당연히 나는 분노했다. 완전히 폭발하기 일보 직진이었다. -별것도 아닌게! 더 흥분했으면 책상 날라 갔겠다.
내가 그 선생에게 더 분노한 이유는, 그 친구를 목원대 사회학과에 보내서가 아니라, 성적을 잣대로 재서 보냈기 때문이다. 재능을 무시한 채 모의고사 성적을 기준, 잣대로 재서 보내니, 대학에 간 학생들 중 자신이 전공하는 학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 방황하는 학생이 생긴다.
한편, 목원대 사회학과를 선생의 잣대에 의해 들어갔던 사람은 성이 임씨였는데, 나와 학교 주위를 거닐면서 과학적인 얘기를 주고받았던 아주 친했던 친구였다. 그 친구는 상당히 다혈질이었다. 세상에 알려진 인물 중에 이상협이 있는데, 이상협 스타일 비슷했다. 그 친구는 목원대 사회학과 91학번이다.
그 친구는 나와 봉고차(운전사는 나의 아버지)로 학교를 다닐 때, 봉고차가 목원대 부근을 지날 때마다 “목원대가 대학이냐!”라고 하다, 결국은 목원대 사회학과에 들어갔다.
완전히 열 받은 나는, 미국 또는 호주로 가기 위해 더 애를 썼다. 분통터져서 도저히 한국에는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세계적인 업적이 없었던 나는, 미국이나 호주로 가는 것을 보류해야만 했다.
그처럼 분노와 좌절감에 있던 나에게 작은외삼촌이 “짜식, 그런 걸 가지고 뭘 그리 낙담 하냐? 네가 정말 물리학을 하고 싶다면 전산과를 나와서도 되지 않냐? 좌절만 하지 말고 전문대 전산과에 시험을 봐라”식으로 여러 번 말씀했다. 작은외삼촌은 자동차 정비를 하기 싫어서 방황하던 중, 마음을 잡은 후로 한남대 전산원에 시험을 봐 입학하여, 전산의 길을 걷게 된 사람이다. 작은외삼촌은 8급 공무원인데, 남 다른 성실함으로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고 있다.
고집이 센 나는, 처음에는 작은외삼촌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다, 호주에 계신 외삼촌의 전화를 받은 후로, 충남전문대학(현. 대덕대학) 입시 원서를 가져다 전자계산학과에 과감하게 지원했다. 그리고, 시험을 봐 당당하게 합격했다. 수학을 다진 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60점 만점에 50점 정도를 받은 것 같다. 몇 개월 공부한 것치고는 잘 나왔다. 수학에 매달리기를 잘했다는 생각이다. 확실히 틀린 문제는 확률문제였다. 극한, 미적분, 방정식, 행렬 등은 재미가 있었는데, 확률은 짜증나기 일수였다. 요즘은 확률도 할만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충남전문대학 전자계산학과를 지원하게 된 이유가 있다.
전기대 입시에 실패한 나는, 후기대 입시에 관해, 교무실에서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하게 되었다. 담임선생님의 책상 오른편 앞으로는 물리학과를 굉장히 욕하던, 즉 서울대가 아니면 물리학과는 밥 빌어먹기 힘들다고 수업시간마다 강조하던 수학 선생이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물리학을 정 하고 싶다면 건양대 물리학과나, 천안에 있는 대학의 물리학과를 가라고 했다. 나는 담임선생님의 얘기가 다 끝났는지 알고 뒤돌아 교무실을 나와 버렸다. 담임선생님은 하시던 얘기가 다 안 끝나서 기분이 무척 상하셨다고 한다. 담임선생님이 나의 어머니께 전화를 해서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은 독일어를 담당하셨다.
그때는, 한남대 전산원을 다닌 작은외삼촌의 말씀이 있은 후였기 때문에 나는 전문대 전산과를 염두하고 있었다. 미국이나 호주로 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후기대 입시가 끝나고, 전문대 입시 때가 되었을 때, 담임선생님은 대전보건전문대나 중경공업전문대는 성적이 안 된다며 충남(전산)전문대 제어계측과를 지원하라고 말씀하셨다.
야호, 나는 충남전문대학 원서를 가져다 무조건 전자계산학과에 응시했다. 성적이 전산과를 들어갈 정도가 안 된다며 담임선생님은 제어계측과를 지원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이에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전산과를 고집했다. ‘꺾으시고 싶으시다면 얼마든지 꺾으세요. 고집으로 똘똘 뭉친 최(崔)씨도 변(卞)씨 고집은 못 당합니다. 선생님은 김(金)씨잖아요.’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후기대 입시 때 나에게 당한 수모가 있으셨는지, 이번에는 “네 마음대로 해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과감하게 충남전문대학 전자계산학과에 응시해서 당당하게 합격했다. 나의 고집의 승리였다. 이리하여, 획일교육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조그만 발판이 마련되었다.
내가 전자계산학과에 합격하자, 담임선생님은 굉장히 좋아하셨다. 나의 어머니께 전화를 해서 물리학과보다 백 배 낫다고 말씀하셨을 정도였다. 그럴 만도 했다. 그 당시에, 전문대 전산과는 취직률이 90%이상이었다. 전산 자격증이 있으면 취직이 100%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4년제 대학의 취직이 잘 안 되는 학과를 나온 사람이 전문대 전산과를 지원하는 경우가 있었다.
IQ 두 자리의 고등학교 시절 9
①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소피 마르소, 브룩 실즈의 팬이었고,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는 최진실, 왕조현의 팬이었다. 우리 때는 최진실, 왕조현이 인기가 많았다.
나는 최진실과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그저 바람일 뿐이었다. 연예인은 연예인과 결혼하는 게 이상적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최진실의 사진에다 키스한 후로, “성모님, 최진실을 제 아내로 주세요”라고 청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최진실은 나와 수준이 맞지 않는다. 최진실에게는 아주 성실한 직장인이나, 잘나가는 운동선수나, 아주 유망한 기업의 사장 정도가 어울리겠다. 내가 뭐가 잘났다고. 이제는 평범한 여자가 좋을 것 같다. 이영애 말이다.
② 신부가 되려던 꿈을 포기한 이유 중, 가톨릭대학은 대학입시성적으로 학생들을 선발했다는 점도 있다. 나는 가톨릭대학도 대학입시성적으로 학생들을 선발한다는 점에 반발했다. 훗날 누군가가 말하길, “가톨릭대학 역시 한국의 대학이므로 가톨릭대학도 문교부의 입시 정책을 따라야만 한다”고 했다. 한국의 문교부가 한 일이 뭘까.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예비 신학생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으며, 외방전교회의 신부에도 관심이 많았다. 나는 주교감으로도 여김을 받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함께 예비 신학생 모임에 갔던 사람(나보다 두 살이 어리다)은 2000년에 부제가 되었다. 부제는 신부가 되는 바로 전 단계이다. 내가 신학교를 갔다면, 나는 1998년이나 1999년에 부제가 되었겠다.
신부가 될까, 아니면 천체물리학을 선택해 우주로의 발판을 마련할까 고민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가톨릭대학을 포기했다. 물리학으로 눈을 돌렸다. 물론, 힘을 얻고 싶다는 욕구도, 결혼하고 싶다는 욕구까지도 작용했다.
IQ 두 자리의 고등학교 시절 10
① 고등학교 2학년 때의 국사 시간에, 뛰어난 실력의 국사 선생님으로부터 정약용 선생님에 관해 들은 나는, 정약용 선생님처럼 여러 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남기겠다고 다짐했다.
② 고등학교 때부터, 나는 정도전처럼 발해의 영토에도 관심이 많았다. 정도전을 알아서가 아니라, 고등학교 때의 사회과부도로부터 각 민족의 영토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 왔는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민족은 고구려 때가 가장 영토가 넓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후로는 발해가 최고였다.
4세기의 호랑도(虎郞島)를 그린 지도를 보니, 요즘의 호랑도(虎郞島)와 거의 같았다. 고구려와 백제+신라의 국경은 휴전선이고, 백제와 신라의 국경은 지역감정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누구 말대로 역사는 도는구나.
교실에 걸려 있는 태극기를 봤는데, 빨간색과 파란색의 경계는 휴전선과 비슷했다. 빨간색은 북한이었고, 파란색은 남한이었다. 위치까지 같았다.
③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나는 태상혁명론으로 향했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정도전은 맹자의 ‘역성혁명론’이었다. 역성혁명론이란 ‘왕이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힘을 사용해 왕조를 바꿀 수 있다’는 혁명적인 주장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나온 ‘태상혁명론’이란, 한민족의 국민성을 세계 3위 이상으로 끌어올려 유태인, 게르만에게도 뒤지지 않는 국민의식과 민족 응집력에서 존재하게 한다는 것이다. 훗날까지 하면, 이를 위해서는 썩은 정부를 어떤 수를 써서라도 타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내가 디자인한 태상기를 보여줬다. 친구는 “그게 뭐냐?”라고 나에게 물었다. 그의 물음에, 나는 “태상혁명기”라고 대답했다. 태상혁명기(太上革命旗), 줄여서 태상기(太上旗)이다.
한민족의 국민성을 세계 5위로 끌어올리겠다고 하자, 친구는 꿈도 야무지다고 했다. 못할 것도 없었다. 나는 ‘국민성의 향상이 없다면, 참된 교육의 실현이 없다면 한국은 계속 외세에 당할 뿐’이라는 생각에 있었다.
한민족의 국민성이 막강해 진다면, 정신대에 관해 사죄하지 말라고 사정해도, 심지어 사죄하면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위협해도 일본은 사죄하게 돼있다.
‘국민성의 향상을 위해서는 교육혁명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국민성의 향상을 위해서도 획일교육을 쓸어버려야 했다. 이제, 획일교육은 쓸어버려야 할 대상일 뿐이다.
생각하건대, 국민성의 향상 없이, 참된 교육의 실현 없이 ‘21세기 한국~통일한국’의 번영은 존재하지 않는다.
IQ 두 자리의 고등학교 시절 11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나는 동아일보를 거의 매일같이 읽었다. 교감 선생님인가 신문의 사설을 많이 읽으라고 학생들에게 당부하셨는데, 나는 교감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후, 더욱더 동아일보를 읽었다. 교감 선생님의 말씀은 논술이 시행되기 전에 있었다. 좋은 선생님의 말씀은 역시 시대를 앞선다.
나는 동아일보를 한국 최고의 신문으로 여긴다. 하루라도 동아일보를 읽지 않으면 답답해진다. 안중근 의사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란 말씀이 생각난다. 동아일보는 친절하게도 1995년인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부반장이 나에게 물은 물음을 미국의 심리학자가 증명했음을 알려줬다. 동아일보를 거의 매일같이 읽었던 보람이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학교를 통해 소년조선일보를 읽었다. 나의 경험에 의해서도 소년신문은 굉장히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소년신문에 있는 ‘숨은 그림 찾기’를 좋아했다. 혹시나 내가 발견에 특출한 것은 숨은 그림 찾기를 잘한 게(열심히 한 게) 도움이 되었을지 모른다. 자녀에게 소년동아일보 읽기를 권하는 게 좋다.
동아일보를 거의 매일같이 읽은 지 2006년으로 17년이다. 서기 1999년이면, 동아일보를 거의 매일같이 읽은 지 10년이다. 서기 2000년이면, 내가 한국의 획일교육에 선전포고를 한 지 10년이다.
IQ 두 자리의 고등학교 시절 12
자녀가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면 교회(성당), 절에서의 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데, 그런다고 자녀가 성공하는 게 아니다. 부모가 자녀의 종교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순전히 대학입시 때문이다. 자식이 대학에 가야만 출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울대를 비롯하여 몇몇 간판대가 출세하는 장소로 적격이라고 한국의 부모들은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누구들 말대로 한국의 간판대가 엄청 대단한가 보다. 1994년, 나는 충남전문대 제3회 생금문학상(시 부문)을 수상했다. 이도 간판일까. IQ 두 자리가 인류 역사상 10대 천재에 포함되면 서울대 전 역사가 꿈꾸지도 못할 출세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두발 자유는 없었지만, 교복을 입지 않아서 굉장히 편했다. 나는 옷에는 신경을 별로 안 써, 옷값도 별로 안 들어갔다. 나는 유행에 민감하지 않은 편이었다.
나는 남이 좋은 옷을 샀다고 해서 덩달아 좋은 옷을 사지 않는다. 어머니가 중학교 때 사주신 잠바를 고등학생이 돼서도 계속 입고 다니는 수준이었다. 청년이 돼서도 입으려 했던 수영복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산 수영복이었다. 대전 대흥동 성당에서 여름성경학교(초등부)를 간다고 하기에, 어머니가 나의 역사상 처음으로 사주신 팬티 수영복이었다. 지금도 가지고 있다.
뭐 하러 돈을 낭비할까. 남이 뭐라고 하든 무슨 상관일까. 내가 좋으면 그만이다. 이도 일종의 개성이다. 나는 싸구려 운동화를 신고 다닌다. 가격은 2만 원 이하겠다.
그 당시는 교복 자율화여서 그나마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나의 창의성은 많이 손상되지 않았겠다.
IQ 두 자리의 전문대학 시절-1
나는 획일교육의 추종자들을 향한 무차별 공격을 다짐했다. 획일교육을 파멸시킬 수만 있다면 정권이라도 잡는다. 노태우 대통령을 타도하자는 시위가 일어났을 때, 나는 적극적으로 시위에 가담했다. 왜냐하면, 정계로 진출해 획일교육을 쓸어버리는 데, 한민족의 국민의식을 세계 3위 안으로 끌어올리는 데 힘을 기울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패를 해도 미국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정도전이 되지 못했다. 세상의 힘은 권력을 쥔 자의 손에서 군사력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자의 손에서 나온다는 것을 망각했나 보다. 국민 다수의 힘을 제외하고, 인간 세상에서는 절대 권력에 맞설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을 빨리 인식했어야 했는데, 나의 생각이 짧았다. 다시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태상혁명론의 길은 멀고도 멀었다. 나에게도 좋은 주군이 나타나면 좋을 텐데.
시위에 적극 가담하다, 현실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로는 시위를 그만뒀다. 이후로는 시위에 한 번도 가담하지 않았다. 실망만이 남았을 뿐이다.
한총련을 생각할 때마다, 정말 철부지라는 생각이 든다. 강조하건대, 공산주의는 실패작이다. 중국 같은 경우는 수정공산주의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버텼다. 나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더 싫어한다.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에는 이가 갈린다.
한총련은 해체되거나 행위 사상을 바꿔야 마땅하다. 누구에게 있어 공산주의의 이상은 좋지만, 공산주의의 지도자는 프롤레타리아의 선거에 의한 지도자가 아니라, 비정상적인 수단으로 굴림을 하는 지배자이기 때문에, 결국은 공산주의 본래의 뜻을 상실하게 된다(로자 룩셈부르크). 독재자와 그 일당의 탐욕에 의해 ‘동물농장’같은 경우를 초래한다. 폴포트는 프롤레타리아 왕국의 건설을 원했지만, 정작 폴포트 자신이 수정 이전 공산주의의 최고 부르주아였다. 수정 이전 공산주의는 너무 모순이 많은 환상에 불과했다. 공산주의는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이상과 현실이 전혀 다른 ‘마르크스의 공상’일 뿐이었다.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등급은 있다. 한국의 자본주의를 가리켜 천민자본주의라고 하기도 한다. 북한은 공산주의가 아니다. ‘거지들 왕 세습 독재주의’다. 왕초와는 급이 다르다.
IQ 두 자리 전문대학 시절-2
내가 충남전문대학 1학년일 때, 강경대 사망 사건과 연이은 대학생들의 자살로 인한 데모가 불붙었다. 나도 시위에 가담했다. 시위에 가담하기 몇 개월 전에, 나의 마음을 다질 겸 외우던 이스라엘 애국자의 연설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았다.
“모든 사람들은 한 번은 죽기 마련이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죽는다는 운명은 겁쟁이를 용기 있게 만든다. 우리가 노예로서의 모욕을 받을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우리의 아내와 아이들을 노예가 되게 할 수 있는가? 자유의 용사들이여, 같이 죽자. 우리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영광스럽게 죽자. 영원불멸의 명성이 우리 것이 되게 하자. 적에게 승리를 안겨 주지 말자. -‘성지 순례(가톨릭출판사, P57)’ 중에서(허가:이계창님).
이는 요셉푸스의 글 가운데 일부로, 마싸다에서 이스라엘의 전사 960명과 함께 스스로의 죽음을 택한 이스라엘의 애국자이자 지도자인 엘레아잘 벤 야일의 연설이다. 노 모아 마싸다!! 이스라엘에는 ‘마싸다’가 있지만, 나에게는 코가 있다. 얻어맞아 왼쪽 코와 오른쪽 코가 일치되지 않지만 거울을 보며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훗날(1998.06.13. 오후 12시 55분), 나는 엘레아잘 벤 야일의 연설을 개작하기 시작했다. 개작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누구에게나 꿈이 있기 마련이다. 꿈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좌절케 하지 않는다. 우리가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의 꿈을 짓밟는 무리에게 굴복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후손들에게 획일교육을 물려줄 수 있는가? 위대한 꿈의 실현자들이여, 함께 영광스러운 길을 택하자. 우리의 자녀들과 우리의 후손들에게 떳떳한 모습을 보이자. 영원불멸의 명성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자. 획일교육의 추종자들에게 승리를 안겨 주지 말자.”
IQ 두 자리의 전문대학-3
정권으로의 시도가 처량하게도 부러지자, 나는 랭보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랭보 비슷하게 향했다. -훗날이다. 나는 랭보의 시집인 ‘지옥에서 보낸 한철(민음사, 김현 옮김)’을 1995년 12월, 대전 문경서적에서 사게 되었다.
랭보 비슷하게 향하다 1992년 12월, 나는 처음으로 컴퓨터 통신을 시작했다. 하이텔에 가입을 함으로써 나의 파란 많던 컴퓨터 통신 생활은 시작되었다. 획일교육을 향한 나의 증오가 나를 컴퓨터 통신의 세계로 이끌었나 보다. 그 당시 나는 김완섭, 김핵과 더불어 하이텔 플라자 4대 천왕이었다.
컴퓨터 통신을 시작한 후 몇 년간, 세계적인 업적이 없었던 나는 별거였다. 내가 주장한 ‘심령에너지 차원적 등가’는 수학적 증명이 없어 가설로만 그치고 있던 상태였고,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디자인한 태상기(太上旗) 역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 1994년, 나는 마침내, ‘수면중 머리가 좋아지는 방법’등을 하이텔의 플라자에다 올렸다. “헛소리하지 말라”는 공격을 받았다. 이래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과거처럼 미래의 어느날, 내가 주장한 내용을 주장할 사람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획일교육 따위에는 굴복하지 않는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수업시간에 교련 선생님, 영어 선생님으로부터 학교성적 때문에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한 학생들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청소년들이 흘린 피에 약속했다. 나의 목숨을 비롯해,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반드시 획일교육을 멸망시킨다. 이로부터 8~9년(1998년 기준)이 흘렀다. 획일교육을 죽이는 유일한 방법이 우주밖에 다녀오는 것이라면 기필코 우주밖에 다녀오겠다. 안 되더라도, 방법이 이것밖에는 없는데, 시도하는 수밖에.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고사성어(古事成語)가 있다.
획일교육을 결코 21세기로 넘겨줄 수 없다. “하늘이시여 제발, 획일교육을 멸망시켜 주시옵소서, 제발~. 언제까지 어린이들을, 청소년들을 방황하게 하실 셈입니까? 저의 목숨을 원하신다면 마땅히 드리겠나이다. 저는 이제 가망이 없습니다.” 마지막 희망이라도 잃지 않으려고 했던 나는, “30여 개가 넘는 아이디어 중에서 몇 가지는 먹혀들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하느님께 매달릴 수만 없었던 나는 훗날, 본격적으로 점성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점성학을 미신에서 과학으로 끌어내리는 작업에도 착수했다.
나는 새로운 사실의 발견, 이론의 정립, 이론의 최종적인 완성도 시도했다. 하이텔에 해지를 신청했던 나는, 해지를 신청한 지 3년만에 ‘특수상관통합이론’과 ‘변성재 인물 생년월일 정리’를 탄생시켰다. 백과사전에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백과사전도 재능을 알려주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한겨레신문사에서 출판한 ‘20세기 사람들’, 나를 버티게 해준 ‘천재들의 학창시절-진선출판사’까지도 재능을 알려주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수면중 아이큐 증가법’을 이은 또 다른 쾌거였다. 백과사전은 이제 사람들의 재능을 알려주는 도구가 된다.
3. 충남전문대학(현재는 대덕대학) 졸업과 이후
국민회의 입당을 시도하다
나는 충남전문대학 시절에도 성적이 좋지 못했는데(전체 평점 C+), A학점을 받은 과목은 영어, 현장실습뿐이었다. F학점도 두 과목이었다. 학교성적이 여전히 저조한 시기를 보내다 1995년, 충남전문대학 전산과를 졸업했다. 1998년, MBC 저녁 9시 뉴스 속 대전 뉴스에서 충남전문대학은 대덕대학으로 이름을 바꾼다고 했다.
충남전문대학 2학년을 포함, 네 번의 등단 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 당시, 나의 시 수준은 습작 수준이었다.
훗날에는 국민회의 입당 시도마저도 실패했다. 왜냐하면, 학벌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학벌이 약한 사람에게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또한, 김대중 총재의 제갈량이 되겠다는 식으로 얘기하며, 김대중 총재를 주군으로 모시고 싶다고 하자, 김대중 총재의 다른 지지자들이 삼국지를 많이 봐서 이상해진 사람이 왔다며, 나를 조롱했다. 아주 뭐 같은 얘기도 했다. 국사무쌍(國士無雙), 유방은 한신을 알아봤다. ‘화씨지벽(和氏之璧)’이란 고사성어도 있다. 아직은 때가 아닌가 보다. 누구에게나 때가 있다.
한편으로, 그들이 나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아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비범한 능력이 있었다면,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겠다. 비범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으니, 내가 들어갈 자리가 분명히 있겠다. 한명회가 유자광을 알아보듯, 백락이 백락을 알아본다. -나는 ‘① 노태우 대통령 타도 ② 정권 진출’을 꿈꾸며 가담한 데모를 그만둔 지 1년만에 노태우 대통령의 신변 안전 작업을 도왔다.
베게너의 대륙이동설 정도의 업적을 내놔야겠다. 뭐 같은 경우를 당했다고 해서, 나의 인생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더욱 강력해지면 된다. 나는 귀곡자, 손무, 한신이 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라이벌 의식이 생길 뿐이다.
훗날, 김대중 후보를 향한 믿음을 지켰다. 조롱을 받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을 향한 믿음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나의 여러 시도가 쉽게 부러지자, 하는 수 없던 나는 세계적인 업적을 남기는 시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적인 업적이 없는 상태에서 미국으로 가면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독창적인 업적에 있어서는 후한 대접을 하는 나라였다. 지금은 나이가 많아서 희망이 없지만, 그 당시, 나는 나의 과학 재능을 살리고 싶은 마음에 미국으로 가고 싶어했다.
훗날에는 장영주와 장한나가 너무 부러웠다. 박찬호, 박세리까지 너무 부러웠다. 미국에서 활동한다는 자체가 나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나의 예측이 적중하다
1996년, 드디어 ‘수면중 아이큐가 좋아지는 방법’을 미국의 교육심리학 박사가 주장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기적적으로 봤다. 그 미국의 박사가 주장하기 2년 전, 내가 하이텔의 플라자에다 올려놓았다가 헛소리로 몰린 내용과 95%이상 일치했다. 그 교육심리학 박사의 주장은 미국에서 화제를 낳고 있었다. 내가 주장하면 헛소리고, 박사가 주장하면 대단한 이론이구나! 그래도 나는 기뻤다.
나는 하이텔의 플라자를 내가 생각한 가설이나 이론의 발표장으로 삼았다. 미래의 어느날, 내가 주장한 내용을 주장할 사람이 반드시 나타나리란 생각에도 있었다. 남이 뭐라고 하든, 내가 먼저 남겼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도 하이텔의 플라자에 글을 남기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나는 나의 글을 하이텔의 플라자에다 올려놓은 후, 내가 올려놓은 글과 다른 사람의 글을 동시에 갈무리했다. 내가 먼저 발표했음을 보장하는 확실한 증거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의 이런 생각이 3년 만에 적중했다. 하이텔의 플라자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한국에서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처량하게도 이 정도였다. 꿈과 재능이 짓밟힌 상태에서 나의 이론마저 빼앗긴다면 절망만이 있을 뿐이었다.
⋇ 나의 인생은 교육분야에서의 나의 논문이다
미국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남겨진 여러 글에서 보여지 듯, 나는 초등학교 5학년, 초등학교 6학년 때가 가장 행복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학교 운동장에 나가 흙댐을 만든 후 침식작용, 퇴적작용을 탐구했다. 학생과학관에 가서는 호기심 많은 눈으로 여러 자료를 봤다. 집에서는 모형비행기도 만들어 봤다. 방해가 되는 인물은 없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강요하지 않더라도 스스로의 길을 잘 찾아 나선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부터는 조롱을 받는 인물에 불과했다. 미국이었다면 달랐을지 모른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더 역사상 천재들의 삶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 역사상 천재들의 경험을 많이 경험했다. 다 빈치도 예외는 아니다. 나의 과거 중 일부분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알려지지 않은 14세 이전의 내용과 좀 비슷할 것이다.
또한, 종교에서 말하는 기적도 많이 일어났다. 나는 통찰력이 상당히 강한 편이라 다른 사람이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도 인식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성경을 펼치는 경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두 번에 나에게 해당되는 내용이 나올 때도 있었다. 하느님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상태로 여길 수 있을 정도였다. 또한, 성 요한 비안네 신부 비슷한 경우를 15년(1998년 기준)이나 체험했다. 하느님은 나를 필요로 하셨나 보다. 나는 어깃장을 놓는 수준을 보였다.
하느님은 나에게 신부가 되기를 여전히 원하실 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신부가 되지 않겠다. 신부가 되는 것만큼은 거부하겠다. 지난날의 내가 아니다. 신부가 되면 작품을 창작하는 데 있어서도 제약을 받을 수 있다. 나는 작품의 창조에 있어서 만은 어디에도 구애를 받고 싶지 않다. 수도자 역시 거부하련다.
이 내용은 ‘믿거나 말거나’이다. 내친김에, 마음을 크게 가지면서 위의 내용까지 추가한다. 다른 내용은 밝히지 않는다.
학창시절의 성적표
지금도 학창시절의 성적표가 있다. 학창시절의 성적표가 지금까지 존재하는 이유는, 추억이라기보다, 놔두면 훗날 도움이 되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나의 ‘학교 성적표’를 보면,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선생님이 특기사항에다 ‘발표력 좋다’, ‘창의적으로 해결한다’는 등의 내용을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 과학점수가 제일 높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사기소리 성당초등학교에서 당진 탑동초등학교로 전학을 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의 담임선생은 학업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을 군대식으로 괴롭혔다. 원자폭탄, 반듯이 누운 채로 고개를 들고 양팔을 위로 드는 군에서나 볼 수 있는 가혹행위까지 했다. 준 삼청교육대였다. 미국 같으면, 그런 선생은 완전히 매장되었겠다.
나의 학교성적은 다시 형편없게 되었다. 강압적으로 나오면, 나는 그 공부는 하지 않는다. 나의 공부는 자율성이 주어질 때만 성립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나는 그림 그리기에서 상을 받았다. 열심히 새마을운동을 그렸는데, 선생님은 자연보호로 인정했다. 새마을운동을 그린 게 자연보호로 인정을 받아 상을 받게 되었다. 1981년 10월 13일의 일이었다. 내가 미술가의 길을 택했다면 초현실주의 화가가 되었겠다. 초현실주의 화가가 아니면, 초현실주의 조형 예술가가 되었겠다. 3학년은 이렇게 건너간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은 뚱뚱하셨다. 뚱보 선생님은 좋은 분이셨다. 정도영 선생님이 특별활동 시간에 칠판에다 분필로 ‘White’, ‘Black’이란 단어를 적으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퍼플은 보라색이라고 말씀하셨다. 발음은 좀 엉망이었지만, 힘 다해 가르쳐 주셨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였는지, 나의 학교성적은 평균 십 점 이상 올랐다. 그래서, 나는 진보상을 타게 되었다. 1982년 6월 14일의 일이다. 지금(1998년)으로부터 16년 전의 일이다. ‘제 270호. 상장. 4학년 4반. 성명 변성재. 진보상. 위 학생은 교내에서 실시한 2차 학력평가에서 그 성과가 뛰어나게 훌륭하였기로 이 상장을 줌. 1982년 6월 14일 탑동국민학교장 구자록’. 이러다, 나는 동상까지 탔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대전 대흥초등학교로 전학을 하게 된다. 내가 전학을 한 대전 대흥초등학교는 특별활동을 잘해주던 학교였다. 학교성적은 또 다시 올라갔다. 산수성적은 ‘수’였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학교 교육은 주입식이었고, 강제적이었다. 나의 학교성적은 다시 곤두박질했다. 수학은 ‘양’을 맞았는데, 수업시간에 조금이라도 집중을 하면 확 올라가고, 집중을 전혀 하지 않으면 확 내려가고 했으므로, 결국, 수학 성적은 ‘양’, ‘가’로 남았다. (80점+20점)/2는 ‘양’ 또는 ‘가’였다.
나의 학창시절 성적표는 일종의 논문으로 작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성적은 강압보다는 자율성을 보장해 주는 상태에서 더 높게 나올 수 있다는 결과이다.
나의 이런 생각은 몇 년 정도만에 적중했다. 1997년 10월 22일자인가 10월 23일자인가 중앙일보에, ‘‘자율성을 주니, 점수가 더 좋게 나오는 것 같더라(?)’라는 결과가 있었다’는 식으로 되어 있었다. 통제하는 공산주의보다 자율성을 보장해 주는 자본주의가 훨씬 발전했다는 사실은, 자율성을 보장해 주는 상태가 발전에 있어서 훨씬 효과적이라는 불변을 뒷받침해 준다. 성적표를 버리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반에서 꼴지 3등인가 한 성적표는 부모 몰래 연탄난로 속에 집어넣었다. 나의 기억으로, 고등학교 2학년 때의 기말고사 성적표였다. 55명 중에 53등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정도니, 난로 속에 들어갔겠다.
내가 한국의 입시공부를 소홀히 한 이유
중학교 때, 전교석차를 몇백 등씩 올리던 게 생각이 난다. 나는 조금이라도 공부를 하면 성적이 급상승했고, 아주 안 하면 팍 떨어졌다. 이 점은 수재들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한국의 입시공부를 소홀히 한 이유 중에 나의 창의성을 미국으로 갈 때까지 현 수준으로 유지하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본격적인 공부는 미국에 가서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가소로운 획일교육
1년 전(1998년 기준), 나는 자신이 들어간 학과가 자신의 재능과 맞지 않아서 방황하는 충남대 화공과 학생을 봤다. 그가 문인이 되었더라면 카프카에게도 뒤지지 않았겠다. 그런 노벨 문학상감이, 자신과 화공과가 맞지 않는다며 휴학을 한 채 방황을 하고 있었다. 학교를 그만 다니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평론가가 되라고 했다. 나의 말에 그는 “평론에 재능이 없다”고 했다. 그의 자신이 없는 말에 내가 아니라고 하면서 자세히 그에 대한 설명을 하자, 그는 “평론에 재능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어려서부터 물리학으로 이끌림을 받았다면, 아인슈타인에게도 밀리지 않을 훌륭한 물리학자가 되었을 텐데, 그 역시 타격을 받은 채 30대가 되어 있었다. 천리마가 수레나 끌면서 비참하게 짓밟힌 상태였다. 아울러 그의 모습은 의학연구소의 소장을 연상하게 한다. 그가 의학을 전공했다면 세계적인 의학자가 될 수 있었겠다. 노벨 생리․의학상에 다가갔겠다. 제대로 된 신약 몇 개 개발해도 엄청난 액수의 달러를 버는 사람이 될 수 있었겠다.
한국의 교육제도는 몇천억, 몇조(단위:원) 이상으로 놀 사람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IMF한파 타령을 했다. 그런 걸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 한다.
아주 젊은 여자(20대 초반)가 우리 가게로 들어왔다. 그 여자에게서 풍겨 나오는 기운을 느끼니, ‘바이올린을 했다면 장영주만큼 컷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는 은행의 여직원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게 그 여자의 운명이거나 팔자일지도 모른다. 이 얘기를 모르는 게 그 여자에게는 약이 될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중학교를 다니던 형이 있었다. 그 형은 나이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노래의 음정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고 있었다. 음대를 갔다면 대성했을 것이다. 재능을 살렸는지 궁금하다. 한국의 중학교부터는 재능의 말살이라, 재능을 살리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언젠가, 내가 140번 시내버스의 맨 뒷좌석에서 있었을 때, ‘구어영어 발음과 청취력 이렇게 해결된다(도서출판 현대어문사)’를 보고 있었다. 이때, 옆에 있던 중년 아저씨가 나를 보더니, “자네, 영어 공부를 하나? 나는 노래를 조금은 했었지. 지금은 잡다한 일이든 뭐든 안 해본 일이 없어”라고 말했다. 나는 탄식을 하는 고생에 찌든 모습의 아저씨를 봤다. 그 아저씨에게서 받은 느낌에 의하면 1류 가수는 어렵고, 재능을 살렸다면 한 2류 정도는 될 수 있었겠다. 지금 생각하니, 안무나 안무 코치 정도는 거뜬했겠다. 가수로 하면 김종서는 확실히 아니고, 서태지도 아니고, 과연 누가 있을까? 약간 이주노 정도이다. 그 아저씨는 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나 보다.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었다. 나는 말을 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고해소의 신부님처럼 잘 들어주는 편이다.
이들을 비롯하여, 대다수의 한국 어린이들, 한국 청소년들은 획일교육의 추종자들에게 너무 처참할 정도로 짓밟혔다. 미국의 심리학자가 ‘수면과 기억력의 상관관계’를 발표한 연도를 기준으로, 6~7년이나 먼저 나에게 ‘수면과 기억의 연관성’을 물었던 그 친구도 역시 재능을 살릴 수 없었다. 한국은 오로지 대학입시뿐이었다. 교육이 뭐 같다고 해도 청소년들이 논문이나 주장을 제출할 수 있는 곳이라도 설립했어야 했다. 획일교육에 환장했다고 하더라도, 독창적인 생각을 한 사람을 인정할 정도는 됐어야 했다.
그 친구가 미국에서 있었다면 상황은 달랐겠다. 미국의 심리학자보다 그 친구와 내가 먼저 증명했어야 했는데, 미국에서 존재하지 못한 게 너무 아쉽다. 내가 미국에서 있었다면 많은 발견을 이룩했을지도 모른다.
나도 속이 상한데, 재능을 무참히 짓밟히고 있는 청소년들은 얼마나 속이 상할까. 한국 청소년들의 대부분이 그렇겠다. 스트레스를 푼다는 것이 “분신사바 분신사바 오디세이 그라세이”이다.
서울대 앵무새 여러분
위대한 재능을 지닌 사람들을 병신 취급하며, 우울하게 하며, 평생의 한이 되게 한 수준들이 이룩한 게 고작 IMF한파였다. 능력 있는 청소년들이 자살을 선택하게 한 수준들이 이룩한 게 고작 IMF한파였다.
그런 상태인데도 획일교(劃一敎)의 신도들은 여전히 기가 너무 살아 있다. 영광이겠다. 다 빈치, 아인슈타인, 에디슨 등을 꿈꾸던 사람들의 재능을 짓이긴 업적,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그 불멸의 업적에 영광스럽겠다. 열심히 작당하여 돈 거래를 하고, 시험지를 빼돌리는 등 추악한 짓을 한 것에 너무 자랑스럽겠다. 창녀도 할 말이 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존재해야 했던 것은 정작, ‘도덕성’과 ‘애국심’을 길러 주는 실천적 학습이었다. 그리고, 재능과 창의성을 살려주는 수준이었다. 어떻게 해야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가 필요했던 것이지, 획일교육 따위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국립묘지, 현충사 참배를 실천하고, 부모를 공경할 줄 알며, 더불어 살 줄 아는 모습도 보여줘야 했다. 구성애식 성교육도 필요했다. 나는 남녀공학을 적극 찬성하는 사람이었다. 한국의 부모들이 남녀공학을 반대했던 이유는, 입시공부 할 시간을 이성 교제에 빼앗길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아내 된 여자들은 ‘일주일, 한달’이 어려우면 일년에 몇 번 양로원이나 고아원에 가서 요리도 해주고 식기도 닦아주고 청소도 해주고,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의 경우에는 양로원에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장기 자랑이나 재롱을 보일 수도 있는 것이고, 중학생과 고등학생의 경우에는 양로원, 장애인시설에 가서 청소도 해주고 할 수 있으며, 성년의 경우에는 선물(편지) 등 조그만 한 정성이라도 보일 수 있다. 어른 중, 남자의 경우에는 자기 기술로 봉사를 할 수도 있다. 기술자라면 양로원이나 장애인시설 등 복지시설의 시설을 일년에 하루, 며칠 정도는 봐줄 수 있겠다. 나이별 봉사이다. 학교성적만 좋으면 뭐 하나.먼저, 사람이 되어야겠다.
한국에서는 잘못된 교육을 비판하는 사람이 이방인이겠다. 학교공부만 잘하면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든, 버릇이 없든, 공중도덕이 형편없든 상관하지 않는 수준이다. 서울대 앵무새 여러분, 21세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창의성의 시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