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애의 프로필 VS 변성재의 프로필(평생 친구 하고 싶다)
생년월일/ 1971년 1월 31일
신체size/ 165Cm, 48kg
혈액형/ AB형
출생지 /서울
학력 /한양대학교 독어독문과 졸업
중앙대학교대학원 연극영화 졸업
가족관계/ 2남 1녀 중 막내
취미 / 수영, 승마, 피아노
연극
[짜장면]
영화
[인샬라] [공동경비구역 "JSA"] [선물]
[봄날은 간다] [키스할까요] 카메오 출연
[친절한 금자씨]
C.F
[투유 초콜릿](CF 데뷔작)
[롯데삼강] [세이] [LG 신용카드][헤라 화장품]
[마몽드] [참眞이슬露] [CLOSE UP (베트남CF)]
[웅진코웨이] [LG생활건강] [도도화장품 이소카임]
[한국통신 프리텔 '드라마'] [삼성 지펠냉장고]
[LG-엘라스틴샴푸] [테이스터스 초이스]
[삼성 디지털] [LG캐피탈] [KT]
[LG건설 자이] [LG전자 휘센]
[아모레 아이오페] [웅진식품 자연은]
뮤직 비디오
조성모 [가시나무]
윤종신 [머물러요]
차호석 [내안의 눈물]
오제형[the brand new day]
이수영 [사랑이 지나가면-애수음반]
수상경력
'94 SBS 연기대상 신인상
'95 KBS 연기대상 인기상
'96 MBC 연기대상 우수연기자상
'97 SBS 최우수 연기자상
'98 SBS 연기대상 최우수연기자상
'99 KBS 연기대상 여자인기상
'2001 제2회 한민국 영상대전 포토제닉 영화배우부문 수상
'2001 부산영평상 여우주연상 수상 (봄날은 간다)
'2003 MBC 연기대상 대상
'2005 스페인시체스영화제 여우주연상 (친절한 금자씨)
'2005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 (친절한 금자씨)
'2006 백상예술대상 여우주연상 (친절한 금자씨)
드라마
MBC 특집극 [찬품단자] 주말연속극 [사랑과 결혼]
[동기간] [간이역] 미니시리즈 [의가형제]
수목드라마 [내가 사는 이유]
미니시리즈 [애드버킷]
KBS 월화드라마 [서궁] 미니시리즈 [파파]
KBS 드라마게임 [그녀가 결혼 안 한 이유]
월화드라마 [초대]
SBS [댁의 남편은 어떠십니까?] (드라마 데뷔작)
미니시리즈 [아스팔트 사나이] [사랑하니까]
주말드라마 [로맨스]주말드라마 [파도]
특별기획 [불꽃]
MBC 특별기획 [대장금]
M.C
SBS [출발 서울의 아침]
MBC [주병진 쇼]
SBS [아주 특별한 사랑]
MBC 남북정상회담특집 [유홍준교수의 북한유산답사기]
SBS특별기획 [기아체험 24시간]
SBS [ 이영애의 달콤한 선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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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14세의 나이에, 미국 박사가 주장한 것을 10년 먼저 독창적으로 적용하고 그 박사보다 2년 먼저 공개적으로 발표를 했으나 본인의 업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 가슴 아픈 과거도 있다. 스포츠서울로부터 확인했다. 세계적인 박사가 주장한 것을 중학교 3학년 때 독창적으로 끝낸 것이다. 이런 나는 만 25세의 나이에 새로운 학문을 창시하려고도 시도했다. 고2 때 수면과 기억력의 상관관계에 대해 독창적으로 부반장과 대화하기도 했다. 이는 훗날 동아일보란 신문 3면에서도 정설로 기사화되었다. 미국의 심리학자가 증명을 했다. 친구와 나의 대화가 정설이 된 것이다. 어쨌든 기쁘다. 나는 아이큐가 두 자리였던 사람이었다.
{학 력}
1972년 서울 명동 출생 (전갈자리, 혈액형 A형)
1985년 대흥초등학교 졸업
1988년 대전중학교 졸업
1988 3 2 대전유성고등학교 입학
1991 2 9 대전유성고등학교 졸업
1991 3 4 대덕대학 (전자계산학과) 입학
1992 1 13 ~ 1993 7 12 단기병으로 군(軍)복무
1995 1 26 대덕대학 (전자계산학과) 졸업
2003 1 19 ~ 2003 5 20 삼성 SDS 멀티캠퍼스(EJB & XML Expert(SCJP/SCCD) 과정)
2005 11 10 ~ 2006 1 26 대전∙충남 한나라당 정치아카데미(제 2기)
{경 력}
1992 2 19 ~ 1993 7 12
사무 겸, 1400~1500명(김종필(자민련 총재), 이종구(국방부장관), 이진삼(육군 참모총장) 등) 관리 및 전산관리 외
(노태우 대통령 신변안전 작업, 공문 작성 및 수발, 컴퓨터 관리, 직원 및 사병 관리 등)
[주특기 : 행정] -육군본부사령(계룡대 골프장)
1995 11 23 ~ 1996 2 중 서울컴퓨터학원 강사(워드, 운영체제)
1996 2 8 ~ 2000 3 17 연구소, 시청, 수자원공사 자료 등 워드, 컴퓨터 개인 교습(윈도우, C언어) -프리랜서
2000 6 13 ~ 2001 4 1 충북대 학연산 공동기술연구원 파견 외 (filcom and jobslife 창업 맴버, 2001년 4월 1일부 휴직) -(주)제일정보
2001 4 1 ~ 2001 8 2 해군본부 미(美)태평양함대 연구자료 작업 (4,400장 정도 스캔 깔끔 작업, 아르바이트) -국제기획
2001 10 중 ~ 2005 9 중 자영업 및 아르바이트, 2006 ~ 현재 자영업 및 사업, 한나라당 당원
{별 도 사 항}
1983년 소년한국일보 주최 주산 급수별 대회 ‘금상’
1986년 교리경시대회 1위
1987년 교리경시대회 2위
1994년 생금문학상(대덕대학 신문에 이름이 실림) -대덕대학
청와대 비서실장 감사장(2000.10.13) -청 와 대
청와대 게시판에서의 글 활동으로 조선일보에 이름이 실림 -조선일보
시 => 최우수상 -국방일보
한겨레신문사에서 발행하는 ‘한겨레’에서 본인이 주장한 것 표절 -한겨레
경향신문 인터넷의 잘못된 기사를 삭제하게 함 -경향신문
미 버틀리대 박사보다 2년 앞서 발표 -스포츠서울
글이 논객 난에 뽑힘 -e좋은뉴스
글이 메인화면에 뽑힘 -중앙일보 인터넷
세계적인 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의 잘못된 내용을 알려 수정하게 함 -한국브리태니커
일기는 보통 책(200~300페이지)으로 20~30권 분량 이상, 아이디어 500 정도 이상, 글 수백 편 이상, 아이디어 노트 20권 이상 날려먹다(제기랄) 외 다수 (총 보통 책으로 50권 이상 분량), 시, 소설, 에세이, 우화도 남김, 발명도 함, 작사도 함 -마이 룸
책 출판 (소제목 : 재능살려 弘益人間) -한빛출판사
* 하이텔 초창기, 친일파 김완섭과 하이텔 플라자 4대 천왕, 김완섭, 김핵, 변성재... 김완섭은 원희룡 의원(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과 서울대 동기로, 원희룡 의원과는 자기에게 악플을 단 네티즌 고소 건으로 충돌을 했다. 김완섭은 창녀론으로도 유명했다.
{특 기 사 항}
한글 : 500~600타, 영문 : 250타 정도
정보관리, HTML, 한글, MS워드, 엑셀, 포토샵, 캐드 등
문장 및 문서 작성(기고)
스타크래프트 브루드워, 디아블로 등 못하는 컴퓨터 게임이 없다, 노래 잘 부름
{봉 사 활 동}
1993 신자들 신상정보 입력(4000명 정도(대사동, 대흥동)) -천주교회
1999 3 31 ~ 2000 6 14 주보편집위원
PC 설치 및 에러 교정 (기관 포함)
{그 동안 남긴 것들}
대예측 ‘탈로스 -세상의 미래’, 헤일-밥 혜성의 천구궤도에서 점성궤도현상, 수천억원 이상 가는 아이디어도 생각하였으나 애플이 선수 침, 심령에너지 차원적 증가, 근접거리, 제갈량효과, 인물비교분석적용학, 블랙홀과 화이트홀에서 전자기적 특성을 유도. 블랙홀은 흡수만 하지 않고 화이트홀은 방출만 하지 않을 것임을 주장, 자동차 급발진 원인 고찰, 특수상관통합이론, 저승도 구원설, 조울증과 천재성의 관계에 대한 고찰, 수면중 아이큐 증가법, 핵전쟁을 일으킨다는 마부스의 존재 여부 증명, 상반국가현상, 재능삼위일체론, 아전가드 창설 예정, 전략두뇌협 창설 예정 등 다수
{포 부}
자영업자지만 동생과 리모델링사업을 시작했다. 성공하여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고 대통령 선거에도 나갈 생각이다. 목표는 통일한국의 대통령 비서실장, 국무총리, 대통령, 내각제 총리이다. 현재 나의 별명은 변 사장이다. 물론 리모델링사업은 동생이 사장이지만 말이다.
“변성재를 청와대로!”
청와대 경호실장과의 대화도 있었고 이종구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는 잘생겼다는 말을 들었고 김수환 추기경과는 얼굴을 뚜렷이 마주 보고 있었고 북한에서 미그기를 타고 넘어온 이웅평 대위(그 당시 중령)도 우연히 만났고 여러 추억이 많다. 골프선수 박세리와는 3번 옆동네로 인연이 된다. 대통령이 앉는 자리에 앉아본 적도 있다. 아마 대통령이 회의하는 방이었다. 청와대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손학규 경기도지사(그 당시)와는 악수를 한 채 사진을 찍은 적 있다. 이밖에 등등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고등학교 때 한민족 최초의 노벨상을 타겠다고 다짐했다.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대통령이 노벨상 수상자로 당선된 날짜로 하는 청와대의 감사장을 받았으며 노벨상을 수상하던 날, 김 대통령은 내가 대통령께 보낸 내용에 있는 내용을 언급했다. 또한 청년대한당을 창당하는 것을 꿈꿨다. 내가 창당한 것은 아니지만 청년진보당이 생겼다. 하이텔 플라자에 올려놓은 것이 획일교육 지지 세력에게 조롱을 받자 나는 훗날 내가 올린 내용을 발표할 사람이 나타나리라는 생각도 있었다. 2년 뒤 적중했다. 내가 주장한 내용이 미국의 교육심리학박사(아마 버클리대)에 의해 독창적으로 주장(95%이상 일치)이 되어 그는 미국의 잡지에서까지 화제가 된 것을 비롯하여 국제적으로까지 유명하게 되었다. 또한 서태지나 신승훈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이것은 8년 뒤에 이루어졌다. 신승훈이 피한 상태로 나왔지만 말이다. 동아일보에 나온 세계적 석학 철학자의 세계 평화를 위해서는 다원주의식으로 흘러야 한다는 식의 주장들이 있었는데 이 비슷한 사상을 나는 몇 년 전 독창적으로 이룩했으며 출판이 된 책에 남겼다. 동아일보에 2~3년 만에 남겨지게 된 것이다. 정계 진출을 꿈꿨는데 훗날(1996), 국민회의 입당의사를 타진한 적 있고 어디를 지나다 보니 대전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정계진출 등용문 교육 식으로 정문 쪽에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통일 후의 북의 경제개발을 어떤 식으로 할 지 생각해 책에다 남겼는데 이는 훗날, 김대중 대통령이 나의 생각과 거의 일치하는 생각을 말해 신문으로 알려 졌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수업시간에 딴 생각하다 생각한 아이디어가 있었는데 훗날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독창적으로 만들어 대통령상인가 국무총리상인가 받았다. 발명에서 말이다. 더군다나 TV광고에서 시간을 알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도 이루어졌다. 이밖에 등등.
{한때는 김대중을 향한 열렬한 지지자}
-김대중 후보를 선택했던 이유
1997년 12월 18일, 나는 김대중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한국 교육을 참되게 이끌 수 있는 그릇이라고 판단되었다. 김대중 집안이나 이회창 집안이나 우리 집안과 먼 것은 별 차이가 없지만, 큰삼촌(영어, 프랑스어, 일본어, 라틴어, 한국어 등 5~6개 국어 능통, 신학박사, 서울가톨릭대 교수 역임, 박정희 정권시절 청와대에서 2명의 사제들과 박근혜, 박지만이 있는 자리에서 식사를 함, 탤런트 김혜자씨가 찾아갔었다, 로마 교황 요한바오로 2세(2005년 선종)의 대학원 후배)이 이회창 후보의 할아버지의 장례미사를 집전했기 때문에, 그나마 가깝기로 하면 우리 집안은 김대중 집안보다 이회창 집안에 가까웠다. KBS 축구 해설자였던 박영웅씨는 나의 아버지한테 이회창과 친척이라며 찍어달라고 전화를 하기도 했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김대중이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6.29가 일어났다. 나는 민주 투사인 김대중에게 호감이 많았다. 나는 김대중 후보가 1987년 12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기를 바랐는데, ‘대통령 선거’ 다음 날, 우리 반에 있던 텔레비전으로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기분이 좋지 못했다.
친구와 어디를 갔을 때 전부터 아는 예비역 대령을 만났는데, 예비역 대령은 나에게 “자네는 누구를 찍어?”라고 강하게 물었다. 예비역 대령의 물음에, 옆에 있던 친구가 “성재는 무조건 김대중입니다. 저한테도 김대중을 찍으라고 하는데요”라고 대신 대답했다. 나는 10년 내내 김대중이었지만 친구의 대답에 난처했다. 친구의 대신 대답에 “왜 김대중이야?”라고 예비역 대령이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은 김대중의 경륜과 경제능력을 믿어줘야 한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나는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어야 나라가 버틴다는 것을 은근히 강조하기도 했다. 이왕에 한 표라도 김대중 쪽으로. 나는 이인제를 치켜세우기도 했는데, 이는 이회창 후보에게 갈 표를 이인제 후보에게 가게 하여 김대중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시키려고 한 시도였다.
‘김대중을 찍지 않으시려거든 차라리 이인제를 찍어주세요’ 하는 의도였다.
이회창 후보에게 갈 표가 이인제 후보에게 어느 정도 가면 김대중 후보에게 전혀 승산이 없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한 표라도 더 분산시켜야 했다. 나는 예비역 대령에게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 당시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김영삼시절 아무개 장관이 권 국방부장관(훗날 안기부장)에게 한 말도 알고 있다. 이회창의 아들의 군대 안간 문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대화 내용이었다.
대구∙경북(TK) 주도의 군은 김대중 후보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인제를 지지하는 투도 적절하게 사용해야 했다. 이인제는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국민회의와 합당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예비역 대령은 경기도 출신이었는데 경상도 출신이었다면 나는 이인제를 지지해야 한다고만 했겠다. 이회창에게 갈 표의 몇 분의 몇이라도 이인제에게 가면, 이회창과 이인제가 김대중 후보에게 질 가능성이 있었다. 경상도 표가 양분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예비역 대령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는다.
나는 컴퓨터 통신을 통해 김대중 후보의 ‘반대파’들과 여러 글로 맞섰다. 김대중 후보를 근거 없이 비방하는 글에는 강력한 공세를 취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말이다. 노무현에게 엄청나게 실망했다. 도대체 대통령이란 자가 그처럼 무책임하고 무능할 수 있다니. 차라리 하야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노무현에게 표준 것이 아깝다.
{긍정적인 생각이나 믿음이 긍정적인 삶을 만든다}
긍정적인 생각은 그걸 이루도록 씨를 제공해 준다고 하지 않던가! 맞는 얘기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생각하는 게 말로 나오는 법, 미래는 그 사람의 생각에 달려있다. 긍정적인 미래도 부정적인 미래도 그 사람의 생각이 만드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부정적인 생각을 한 후로는 부정적인 일이 일어났다.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니 저주받은 일들이 일어났다. 위궤양도 폐결핵도 폐 수술 3번, 삶이 힘겨워 지기 시작했다. 물론 가정에도 불행이 생겼다. 결혼할 번한 여자는 나에게서 돌아섰다.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보여 줄 게 없었나 보다. 이 밖에 등등. 그런데,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을 때나 좋은 꿈을 가졌을 때는 좋은 일들이 일어났다. 나의 경우,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생각이 씨가 되는 법이다. ‘나에게는 꿈이 있어. 열심히 노력할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미래와 ‘인생이 더럽게 느껴져. 내 인생은 조지게 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차이는 확연히 구분될 것이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한다. 획일교육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죽음을 택한 청소년들의 피에 우리나라의 잘못된 교육을 파멸시키겠다고 약속한 지 17년(2006년 기준)이 흘렀다. 고2 당시 나는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되어서라도 획일교육으로부터 어린이들 청소년들을 해방시키고야 만다는 생각에 있었다. 3년 후 나는 대통령이 앉는 자리(?)에 앉아 경치를 바라봤다. 아마 대통령 전용실이었다. 대통령 할 만 하구나. 대통령에 그리 집착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청와대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대통령을 꿈꿨더니 그렇게나마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또한, 한민족 최초의 노벨상을 타겠다고 다짐을 했다.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대통령이 노벨상 수상자로 당선된 날짜로 하는 청와대의 감사장을 받았으며 노벨상을 수상하시던 날, 김대중 대통령은 내가 대통령께 보낸 내용에 있는 내용을 언급했다. 후자는 독자적인 것인지 몰라도 그렇게 되었다. 맹자의 역성혁명론이었다. 역성혁명론(맹자)이란 ‘왕이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힘을 사용해 왕조를 바꿀 수 있다’는 혁명적인 주장이었다. 본인이 최초의 노벨상을 꿈꾸지 않았다면 그렇게라도 되었을까. 물론 실수할 번도 했다. 대통령의 차를 대기해야 할 곳에 참모총장의 차를 대기시키게 할 번 했다. 지시를 착각한 것일까. 그리 되었다면 난리가 났을지도 모르지만. 더군다나, 하이텔(1990년대를 풍미한 PC통신사) 플라자에 올려놓은 내용이 획일교육 지지 세력에게 조롱을 받자 나는 훗날 내가 올린 내용을 발표할 사람이 나타나리라는 생각도 있었다. 이게 2년 뒤 적중했다. 내가 주장한 내용이 미국의 교육심리학박사(아마 버클리대)에 의해 독창적으로 주장(95%이상일치)이 되어 그는 미국의 잡지에서까지 화제가 된 것을 비롯하여 국제적으로까지 유명하게 되었다. 만 14세 때 독창적으로 적용하고 만 22세에 공개적으로 발표한 ‘수면 중 아이큐 증가법’이었다. 나는 수백 가지 아이디어와 글을 남긴 상태였다. 또한 서태지나 신승훈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이는 8년 만에 이루어졌다. 신승훈이 피한 상태로 나왔지만 말이다. 노벨문학상을 꿈꿨는데 아직이지만 생금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얼마 전 동아일보에 나온 세계적 석학 철학자의 세계 평화를 위해서는 다원주의식으로 흘러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있었는데 그 비슷한 사상을 나는 몇 년 전에 독창적으로 이룩했으며 출판이 된 책에 남겼다. 동아일보에 2~3년 만에 남겨지게 된 것이다. 정계 진출을 꿈꿨는데 훗날(1996), 국민회의 입당의사를 타진한 적 있고, 어디를 지나다 보니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정계진출 등용문 교육 식으로 정문 쪽에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한나라당 제 2기 정치아카데미에 참여한 후로 정치인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고 있다. 대선 주자인 손학규 경기 도지사(그 당시)와는 악수를 하는 영광을 얻었다. 물론 사진을 촬영했다. 현재는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꿈꾸고 있다. 그래서 정신보건사업에 대해서도 열정을 쏟고 싶다. 나는 이명박 후보를 밀고 있다. 대통령 선거에 뛰어든 이회창 후보에게 조언을 했던 여자가 강의를 할 때 나를 앞으로 불러내 나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해줬다. 우연의 일치일까. 주로 복장과 이미지에 대한 조언이었다. 나의 큰삼촌은 이회창의 할아버지의 장례미사를 집전한 사람이었다. 큰삼촌은 교황 요한바오로 2세(2005년 4월 2일 선종)의 대학원 후배이다. 통일 후의 북의 경제개발을 어떤 식으로 할 지 생각해 책에다 남겼는데 훗날, 김대중 대통령이 나의 생각과 거의 일치하는 생각을 말해 신문으로 알려졌다. 김대중 대통령과 서로의 생각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호랑도 통일비용 500~1000조원 이상 아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스타워즈 영화 시리즈도 모으려고 원했는데 이도 몇 년 후 이루어졌다. 무임승차를 하기 위해 오른 손을 들으니 미그19기를 몰고 넘어온 이웅평 대위(그 당시 중령)의 차가 섰다. 박세리와는 세 번 옆동네 인연이 된다. 김수환 추기경과 있었던 일, 청와대 경호실장과 있었던 일, 청와대 구경 간, 이밖에 등등.
어렵다고 비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겨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자기 미래는 자기 생각이 만든다. 초등학교 여 선생님이 얼마 전 목사님이 이러한 얘기를 해 주셨다고 말씀하셨다. 그 목사님은 자신이 3년 전에 간절하게 원했던 것을 현재 모두 이뤘다는 것이다. 역시 간절한 마음이나 긍정적인 생각은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씨를 제공해 준다. 설령 다른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초인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제공을 해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던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져 바다에 심어져라 해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